반도체, AX(AI 전환), 로봇 등이 이끄는 산업의 지각변동은 기회인 동시에 위협이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장애인 직업훈련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곳이 있다. 지난해 3월 경기도 화성시에 문을 연 ‘경기남부직업능력개발원’이다. 22년 만에 신설된 국내 최대 규모의 훈련기관, 그곳은 개원 1년 만에 장애인 직업훈련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글. 편집실 사진. 전경민
‘장벽’을 허물고
‘존중’을 짓다
경기남부직업능력개발원(이하 경기남부직능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체감되는 건 ‘장벽이 없다’는 점이다. 배리어프리(BF) 인증 최우수 등급을 받은 이곳에는 턱 없는 자동문, 휠체어 이용자 눈높이에 맞춘 스위치, 통로마다 이어지는 안전바가 기본처럼 자리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와 음성 안내, 청각장애인을 위한 시각 알림 시스템도 촘촘히 갖췄다. 장애 유형과 관계없이 누구나 불편 없이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총면적 6,771평의 건물은 중앙 로비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동이 연결된 구조를 띤다. 직무 중심의 하이브리드 훈련이 이뤄지는 ‘실습관’, 훈련 지원 서비스를 담당하는 ‘협력관’, 기숙사인 ‘생활관’. 그 옆에는 신체능력 향상을 위한 다목적 강당이 자리한다. 모든 공간은 하나의 원칙이 관통한다. 경제적 부담 없이 훈련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 그 의지가 건물 곳곳에 스며 있다.
경기남부직능원의 생활관은 휠체어 이용자 전용 방을 마련하고 있다.
경기남부직능원은 비상대피로의 안내 표시는 물론, 입구에는 턱을 없애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훈련의 틀을 바꾼 시스템 혁신
경기남부직능원의 핵심은 산업 변화에 대응하는 ‘하이브리드 훈련 시스템’에 있다. 반도체, AI 등 첨단 산업 직종을 중심으로 3개월 단위 모듈형 훈련 체계를 도입했다. 훈련생은 자신의 선수학습 수준과 희망 진로에 따라 기초부터 심화까지 학습단계를 선택할 수 있고, 특정 모듈만 재수강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대 4개 모듈을 조합해 6개월에서 1년까지, 자신만의 학습 경로를 설계할 수 있다. 이 같은 모듈형 융복합 방식은 공단 차원에서도 새롭게 시도되는 모델이다.
훈련 환경 역시 훈련의 질을 뒷받침한다. 삼성전자에서 실제 사용하는 전자현미경과 3차원 현미경을 갖춘 반도체분석 Lab, AI 업계 최상위급 연산 장비를 갖춘 AI Lab, 제약·바이오 산업을 위한 바이오 Lab 등 현장 수준의 실습 공간을 갖췄다.
실습관 1층에 자리한 메이커 스페이스 ‘이노웍스(Inno Works)’는 경기남부직능원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각종 최첨단 장비를 활용해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구현하고 팀 기반 협업 학습이 이뤄진다. 2층은 발달장애인 특화 공간으로 로봇 서비스, 스마트 사무 행정, 서비스 산업 등 맞춤형 과정과 바리스타 실습실을 운영한다. 3층 ‘하이브리드 트레이닝 존’에서는 AI 데이터 분석, 반도체 품질 분석 등 융복합 기술 수업과 산업기사 자격 취득 훈련이 진행되며, 4층 ‘이노베이션 존’은 대기업 전용관과 교육매체 개발 스튜디오로 산학연계에 활용된다. 이 모든 공간은 ‘이 기술이 훈련생의 직무가 될 수 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고 있다.
장애 유형별 접근성도 세심하다. 청각장애인 특성화 훈련실은 화자 추적 카메라와 텔레코일(T-coil) 시스템 등을 구축해 보청기·인공와우 사용자도 강의 음성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으며 몰입도 높은 훈련 환경을 제공한다. 또한, 온·오프라인 동시 수업이 가능한 융복합 하이브리드 실습실 역시 장애 유형과 무관한 훈련 접근성을 구현하고 있다.
최첨단 장비를 활용해 구현한 이노웍스는 팀 기반 협업 학습이 이뤄지는 경기직업능력개발원의 대표 공간이다.
지역 협력과 로봇, 상생을 그리다
또 다른 강점은 입지에서 비롯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들과 제약·바이오 클러스터(산업단지)가 밀집한 경기도 남부에 자리하고 있어 지역 산업 수요를 훈련에 반영할 수 있다. 또한 삼성전자DX 부문과 두 차례에 걸친 맞춤 훈련, HK이노엔과의 제약·바이오 분야 훈련 등 기업 현장과 직접 연계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교육과정 설계부터 훈련생 선발, 채용 연계, 사후 지원까지 전 과정을 기업과 함께 설계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성과는 공단 최초로 바이오헬스 대표기업과 협업해 의약품 품질관리 분야의 신규 직무를 발굴했고, 중증장애인을 포함한 6명이 실제 고용으로 이뤄지는 성과를 냈다. 이는 장애인이 고부가가치 산업에 진입하는 경로를 연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HK이노엔, 화성시청 등과의 업무협약(MOU)도 잇따르며, 취업 연계와 현장 중심 교육을 위한 협력 네트워크가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로봇 분야의 시도도 눈에 띈다. 로비에 들어서면 로봇 스테이션이 먼저 사람들을 반기는데, 여기 자리한 로봇들은 장애인들의 훈련과 학습, 생활을 돕는 조력자들이다. 이 공간은 경기남부직능원의 주요 사업과 깊이 연관돼 있다. 2025년 한국로봇산업진흥원의 ‘대규모 융합 로봇 실증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된 경기남부직능원은 2개년간 최대 18억 9,000만 원 규모의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이 사업은 로봇을 활용한 장애인 직무 개발과 고용 창출, 그리고 로봇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겨냥한다.
이제 개원 1년 차이지만 효과는 이미 선명하다. 예컨대 한림대학교성심병원과의 협력으로 개발된 직무 과정(로봇 서비스 직무, 로봇 유지보수 엔지니어)을 이수한 훈련생들 다수가 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그렇다. 올해는 ‘로봇 관제 전문가’와 ‘로봇 데이터 엔지니어’ 직무까지 확대해 약 50명의 수료를 목표로 한다.
경기직업능력개발원 로비의 로봇 스테이션은 여러 종류의 로봇이 대기·충전하며 임무를 시작하고 종료하는 거점 공간이다.
기술 너머 ‘사람’을 보다
AI 기술의 발전은 직무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기남부직능원은 수요가 줄어드는 직종은 과감히 조정하고, AI·AX(인공지능 전환) 등 신기술을 접목한 교과목을 신설하는 등 교육과정을 유연하게 개편하고 있다.
경기남부직능원이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장애인의 능력을 증강시키는 도구로 ‘로봇과 AI’를 활용하겠다는 점이다. 반도체분석 Lab의 전자현미경은 눈이 아닌 데이터로 품질을 판단하게 해주고, AI Lab의 머신러닝 도구는 분석의 정밀도를 높여준다. 장애인 직업훈련이 ‘단순 보조 직무’에서 ‘기술 기반 전문 직무’로 진화할 수 있는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좌표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건강 문제로 직장을 떠나야 했던 한 청각장애인은 업무 전환을 목표로 AI 데이터 분석 과정에 지원했고, 경기남부직능원에서 데이터 분석과 머신러닝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결국 그는 한국에너지공단의 데이터 분석 직무에 취업하며 꿈을 이뤘다. 또 다른 훈련생은 “이곳에서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부대끼고 협력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다”라며 성장의 기쁨을 전하기도 했다.
경기남부직능원이 지향하는 인재상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다. 대인관계 및 의사소통 역량, 협력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 개원 1년, 기반을 다진 시간을 바탕으로 올해 경기남부직능원이 내건 키워드는 ‘도약’이다. 첨단 산업의 한가운데서, 장애인 직업훈련의 새로운 좌표는 더 이상 지도 위의 점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의 삶에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경기직업능력개발원이 지향하는 인재상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다. (왼쪽부터) 김원일 교사, 장동수 원장, 김민준 융복합훈련팀장
장동수 원장
“우리는 ‘수료생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대신 한 명을 키워도 제대로, 기업 현장에서 즉시 통하는 인재를 키워내고자 합니다. 바이오헬스 기업과 협업해 신규 직무를 발굴하고 중증장애인 고용을 이끌어 낸 사례처럼, 우리의 ‘질 중심 훈련’ 철학이 현장에서 성과로 나타나고 있어 뿌듯합니다.”
김민준 융복합훈련팀장
“제가 몸담은 융복합훈련팀은 정보통신, 디자인, 기계 등 다양한 분야를 결합해 신기술 중심의 훈련을 운영하는 부서입니다. 특히 3개월 단위의 ‘모듈형 훈련 체계’를 도입해 훈련생이 자신의 수준과 진로에 맞춰 필요한 역량을 단계적으로 쌓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단일 전공이 아닌 융합적 사고를 지닌 인재를 길러내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