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에게 여행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이동과 숙박, 정보 접근의 장벽을 넘어,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사회참여이자 삶의 권리다. 초록여행이 이용자 1,43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장애인은 여행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떠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한 번의 여행은 심리와 건강, 가족관계, 사회참여 의지까지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숫자가 증명한 여행의 가치, 그리고 모두가 떠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과제를 살펴본다.
글. 한정재 상임이사(사단법인 그린라이트)
닫혀 있던 여행의 문을 열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한다. 짐을 꾸리고, 숙소를 고르고, 가본 적 없는 길을 그리며 설렌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떠난다’는 그 평범한 말은 오래도록 손에 닿지 않는 단어였다. 휠체어가 들어가는 화장실이 있을지, 턱 없는 입구일지, 차에서 객실까지 몇 걸음일지 — 떠나기도 전에 따져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많은 장애인 가족이 아예 떠나기를 포기해 왔다.
초록여행1)은 2012년부터 그 거리를 좁혀 왔다.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차량과 유류비, 여행 경비, 운전기사, 여러 콘텐츠를 지원하며 지금까지 11만 명이 넘는 장애인과 가족의 여행 곁에 섰다. 이 모든 것은 국내 대표 자동차기업 기아 주식회사가 출범을 이끌고, 대표 사회공헌으로 삼아 지금까지 한결같이 막대한 후원을 이어 온 덕분에 가능했다. 자동차가 누군가에게는 닫혀 있던 세상으로 나서는 문이 된다는 것을, ‘모두의 이동’을 고민하는 기업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이용자 10만 명 돌파를 기념해 정회원 1만 5,000여 명에게 물었다. 1,439명이 답한 그 목소리2)는 우리가 막연히 ‘좋은 일’이라 믿어 온 여행의 의미를 또렷한 사실로 바꾸어 놓았다.
1) 기아 초록여행은 장애인과 가족·친구가 함께 원하는 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기아가 차량과 제반 비용 일체를 기부하여 운영하는 장애인 여행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약 11만 명이 이용했고, 국내 등록 장애인이면 누구나 국내 8개 거점에서 이용할 수 있다. 홈페이지 : www.greentrip.kr
2) 기아 초록여행 서비스의 사회적 영향과 장애인 관광 활성화 연구(사단법인 그린라이트. 2025.)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제주·강릉 등 전국 8개 권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초록여행 서비스
떠나기 싫은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 오해였다. ‘장애인은 여행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조사에서 “관광·여행에 무관심하다”고 답한 사람은 단 3.7%에 그쳤다. 반대로 “휴식과 건강을 누리고 싶다(89.2%)”, “새로운 곳을 경험하고 싶다(85.7%)”, “자유와 재미를 느끼고 싶다(85.1%)”는 응답은 압도적이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은 비장애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발목을 잡았을까?
응답자들이 꼽은 가장 큰 장벽은 ‘정부·단체의 경비 지원 부족(59.9%)’, ‘적합한 교통수단의 부재(59.2%)’, ‘경제적 여건의 어려움(55.3%)’이었다. 실제로 응답자의 약 67%가 월 가계소득 200만 원 이하였고, 80%가 중증 장애인이었다. 떠나고 싶은 의지는 충분한데, 그 의지를 가로막는 것은 한결같이 ‘나’ 바깥의 구조였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장애인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일은 없던 동기를 새로 만들어 주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뜨거운 동기를 가로막고 선 장벽을 치우는 문제다. 여행은 베풀어야 할 시혜가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권리다.
2024년 신설된 ‘장애인고지대 탐방체험’을 위한 협약식
여행은 무엇을 바꾸는가
그렇다면 장벽이 걷히고 정말로 떠났을 때, 여행은 한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바꿀까. 조사 결과는 예상을 훌쩍 넘어섰다.
먼저 여행의 ‘모양’이 달라졌다. 자비로 떠나는 일반 여행은 ‘1박 2일(41.3%)’이 가장 흔했지만, 초록여행을 이용한 여행은 ‘2박 3일(45.6%)’이 중심이 되었다.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는데, 하루 평균 비용은 오히려 약 28만 원에서 25만 원으로 줄었다. 차량과 유류비 지원이 여행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던 이동 비용을 덜어 준 결과다.
“더 길게, 더 가볍게.” 초록여행이 만든 변화는 이 한 줄로 요약된다.
더 깊은 변화는 마음에서 일어났다.
초록여행을 다녀온 이용자의 98.4%가 “스트레스가 풀리고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고 답했고, “삶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98.1%)”,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졌다(97.7%)”는 응답이 줄을 이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일상에 활력이 생겼다(98.0%)”, “피로가 풀렸다(97.1%)”처럼 건강 인식이 좋아졌다는 응답이 모두 97%를 웃돌았다. 이것이 한순간의 기분 탓이 아니라는 점은, 초록여행을 이용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모든 항목에서 통계적으로 뚜렷하게 높은 점수를 보였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관계의 변화였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를 인터뷰한 한 연구는, 많은 부모가 여행지에서조차 자녀의 안전을 살피느라 ‘휴식’이 아닌 ‘노동의 연장’으로 여행을 겪는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초록여행을 다녀온 가족의 98.4%는 “배우자나 가족과의 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답했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만 마주 앉아 있던 가족이, 같은 풍경 앞에 나란히 선 ‘여행자’가 되는 순간이다. 그 경험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기도 했다. “사회참여 의지가 높아졌다(96.1%)”, “사회가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나아졌다고 느꼈다(92.5%)”는 응답은, 한 번의 여행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기 차량을 배치하여 편의를 확대한 2026년 유니버설 디자인(UD)
이 숫자들 뒤에 있는 얼굴들
지난 5월, 고지대 탐방 프로그램으로 지리산 노고단에 다녀온 한 이용자가 후기를 보내왔다. 고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그는, 높은 산에 오른다는 선택지는 자기 삶에 아예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지대 탐방’ 공지를 보고 “혹시 나도 죽기 전에 높은 산에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고 한다.
초록여행에서 준비한 차량에 전동휠체어를 싣고 노고단을 올랐다. 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짙어 예정된 생태 체험은 무산됐지만, 국립공원공단 지리산의 담당자들은 당사자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생태 이야기와 손공예 같은 대체 프로그램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새벽 3시 50분, 직원들이 함께 일출을 보러 나섰다. 국립공원 측이 준비한 산악용전동휠체어를 타고, 직원과 남편의 도움으로, 그렇게 조금씩 하늘과 가까워졌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평생 여기 올라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남편과 이야기하며 눈물지었습니다.” 노고단 아래로 붉게 물드는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는 그는, 편지를 이렇게 맺었다. “덕분에 힐링하고 돌아와, 힘내서 또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부는 여행길에서, 한 사람은 평생 없는 줄로만 알았던 선택지를 처음으로 손에 쥐었다. 여행이 되돌려 주는 것은 풍경의 기억만이 아니다. “나도 갈 수 있다”는 감각, 곧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존엄이다.
2025년 신설된 ‘섬바다 탐방지원’을 위한 협약식
그렇다면, 무장애 여행은 누가 만드는가?
초록여행이 지난 15년 가까이 증명한 것은 분명하다. 장애인의 여행 욕구는 뜨겁고, 장벽만 걷히면 그 여행은 한 사람의 삶을 깊이 바꾼다. 그런데 같은 조사는 또 다른 사실 하나를 함께 드러냈다. 이용자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차량 증차(36.6%)’였다는 점이다. 서비스가 좋아서 더 자주 떠나고 싶지만, 차량이 모자라 높은 경쟁을 뚫어야만 한다.
이 목소리에 응답해 초록여행은 지난해 PV5 패신저 8대를, 올해 PV5 WAV 4대를 새로 늘렸다. 두 차량 모두 전기차여서 연료비 부담을 한층 덜었고, 특히 WAV는 휠체어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누구나 편히 타도록 설계된 유니버설디자인 차량이다.
그럼에도 아무리 훌륭한 민간사업이라 해도, 한 사업이 마련한 차량의 수로는 수백만 장애인의 여행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 초록여행이 “여행은 효과가 있고, 수요는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면, 이제 그 증명을 모두의 권리로 넓히는 일은 사회 전체의 몫이다.
또 하나, 응답자의 58.7%는 “장애인을 위한 관광 정보가 부족하다”고 했고, 정부가 공들여 조성한 ‘열린 관광지’를 안다고 답한 사람은 33.9%뿐이었다. 좋은 무장애 관광지를 만들어 놓고도 정작 떠날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다면, 그 시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차량과 정보가 보여 주는 풍경은 같다. 누군가의 선의가 길을 열어 두어도, 그 길이 사회의 기본 위에 놓이지 않으면 늘 좁고 위태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던지고 싶다. 무장애 여행은 과연 누가 만드는가?
그 답은 ‘특정 사업이 더 분발하는 것’에 있지 않다. 집 앞에서 목적지까지 끊기지 않는 이동수단, 이름뿐이 아닌 진짜 무장애 객실의 기준, 흩어진 정보를 한데 모아 누구나 믿고 쓸 수 있게 하는 공적 책임, 그리고 민간의 빠른 현장 감각과 공공의 안정성을 잇는 연계. 이 네 가지가 사회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장애인의 여행은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일상’이 된다.
무엇보다 이 일은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다. 노고단에서 국립공원공단의 직원들이 기꺼이 휠체어에 끈을 매어 주었듯, 기아 주식회사는 사업 전반을, 국립공원은 자연을, 지방정부는 길을, 그린라이트는 바른 실천을, 복지 현장은 사람을 — 저마다 가장 잘하는 것을 한데 모을 때, 장애인 가족의 여행은 비로소 더 자유롭고 더 안전해진다. 수많은 사회 주체의 서로 다른 강점이 ‘장애인의 여행’이라는 한 점에서 만나는 것, 우리가 만들고 싶은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향유권 보장 활동을 위한 초록여행의 ‘여행하는 선율-찾아가는 콘서트’
떠날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무장애 여행의 완성은, 역설적으로 ‘초록여행 같은 사업이 더는 특별하지 않은 사회’다. 어느 숙소든 문턱이 없고, 어느 관광지든 휠체어로 닿을 수 있고, 누구나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장애가 있든 없든 “이번 여름엔 어디로 갈까”를 똑같은 마음으로 고민하는 사회 말이다. 조사에서 응답자의 71.9%가 “비용이 더 들더라도 편의가 좋은 곳이라면 가겠다”고 답했다.
장애인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은 서비스에 기꺼이 값을 치르는 당당한 여행의 주체다. 그러니 사회가 답해야 할 것은 ‘베풂’이 아니라 ‘환경’이다. 기업과 공공기관, 지역사회가 저마다 손을 보태고, 그 노력에 정부 정책과 제도가 발맞춰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장애인의 여행은 마침내 ‘특별한 여행’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1,439명의 응답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여행은 한가한 여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심리와 건강과 관계를, 끊겨 있던 사회와의 연결을 회복시키는 힘이다. 그렇기에 누구의 떠남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다.
이번 여름, 더 많은 가족이 망설임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바람이 한 단체의 숙제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되기를 바란다. 떠날 수 있다는 것 — 그 평범한 권리가 모두의 것이 되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가 함께 답해야 할 몫이다.
※ 본 기사는 전문가 필진이 작성한 글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