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동안 장애인 야학과 시민사회 현장에서 성인 장애인들을 만나 왔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배울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쉰이 넘어, 예순이 넘어 처음으로 자기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가던 어느 학생의 손끝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떨리는 손이 완성한 이름 하나에는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 보지 못한 수십 년의 세월과, 그럼에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한 사람의 존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먼저 그 손끝의 이야기부터 꺼내게 된다.
글. 김기룡 교수(중부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육에서 밀려난 사람들
숫자로 먼저 현실을 살펴보자. 2023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장애인의 51.5%가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에 머물러 있다. 절반이 넘는 장애인이 학령기에 의무교육조차 온전히 마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특수교육 제도가 자리 잡기 이전 세대의 장애인들은 물리적 접근성의 제약과 취학 거부, 가족의 부담 속에서 학교교육에서 원천적으로 밀려났고, 그 결과가 오늘의 낮은 학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고령화와 맞물려 더욱 깊어졌다. 2023년 조사에서 65세 이상 장애인의 비율은 54.3%에 이르렀다. 고령 장애인은 학령기에 교육 기회를 놓친 세대이면서 동시에 평생교육 접근성이 가장 취약한 집단이기도 하다. 교육에서의 배제가 한 세대 안에 켜켜이 쌓여 굳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뒤에라도 배움의 기회가 열려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같은 조사에서 장애인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2.4%에 그쳤다. 같은 시기 전체 국민의 평생학습 참여율이 32.3%였으니,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13분의 1 수준에서만 배움에 다가가고 있는 셈이다. 학령기에 교육의 기회를 놓친 성인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은 사실상 유일한 ‘교육적 재기(再起)의 통로’인데, 정작 그 통로가 가장 좁게 닫혀 있는 것이다.
기회가 좁은 것은 배우려는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배울 곳이 없기 때문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전국의 평생교육기관 4,500곳 가운데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161곳, 3.5%에 불과했다. 게다가 장애인이 실제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복지시설을 통해 제공됐다. 배움의 자리가 ‘교육’이 아니라 ‘복지’의 언저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투자 역시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때 장애인 1인당 평생교육 예산은 연간 2,287원에 지나지 않았다. 커피 한 잔 값에도 못 미치는 이 금액은, 학령기를 벗어나는 순간 국가의 교육 투자가 사실상 소멸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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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은
배움 그 이상이다
이런 현실 위에서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이 갖는 의미는 결코 ‘취미 하나 더 배우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민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며, 시혜의 대상에서 권리의 주체로 서는 과정이다.
우리나라 장애인 야학의 역사가 이 점을 잘 말해 줬다. 1987년 인천의 ‘작은자’를 시작으로, 야학은 제도교육에서 배제된 성인 장애인에게 문해교육과 검정고시 교육을 제공해 온 자생적 교육기관이었다. 국가가 채우지 못한 공백을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이 스스로 메워 온 것이다. 변변한 재정 지원도 없이 후원과 자원활동에 기대어 교실의 불을 밝혀 온 그 시간 속에서, 배움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우리도 배울 권리가 있다”는 선언이 됐다.
배움은 한 사람이 세상과 다시 관계를 맺게 한다. 버스 노선표를 읽어 혼자 외출하고, 약봉지의 복용법을 스스로 확인하고, 은행 창구에서 자기 서류를 작성하는 일. 비장애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이 일상의 장면들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 처음 누려 보는 자율의 순간이다. 교육은 이렇게 한 사람을 ‘보호받는 대상’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으로 옮겨 놓는다.
그 선언이 어떤 힘을 갖는지 보여 준 장면이 있었다. 2025년 봄, 전국의 장애인 학습자들은 자신이 배운 글씨로 직접 손편지를 써서 국회에 보냈다. 무려 4,098장, 8만여 글자에 이르는 이 엽서들은 ‘권리 팔만대장경’이라 불렸다. 누군가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배우고 싶다”는 다섯 글자를 적기 위해 몇 번이고 연습했을 것이다. 문해교육의 성과가 곧 정치적 발언의 수단이 된 이 장면은, 배움이 어떻게 한 사람을 ‘요구할 줄 아는 시민’으로 세우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줬다. 글자를 얻은 사람은 자기 삶을 설명할 언어를 얻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힘을 얻는다.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은 바로 그 힘을 돌려주는 일이다.
배움이 자립과 노동, 지역사회로 이어지려면
그러나 배움이 배움에서 그친다면 절반의 성취에 불과하다. 특히 『장애인과 일터』의 독자들과 함께 짚고 싶은 대목이 여기에 있다. 교육은 자립으로, 노동으로, 그리고 지역사회 참여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삶을 바꾼다.
현실의 고리는 촘촘하게 얽혀 있다. 낮은 학력은 낮은 고용으로 이어진다. 2024년 하반기 기준 장애인의 고용률은 34.5%에 머물렀고,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전국 가구 평균의 63.3% 수준이었다. 낮은 학력과 낮은 고용, 낮은 소득이 서로를 강화하며 돌고 도는 구조 속에서, 평생교육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적 개입 지점이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평생교육이 이 연결을 충분히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 연구에서 장애 성인들에게 평생교육 참여의 성과를 물었더니, 자존감이나 대인관계 같은 ‘개인적 발달’ 영역에서는 기대와 성과가 모두 높았지만 ‘취업과 관련된’ 영역에서는 뚜렷하게 낮게 나타났다. 배움이 삶을 풍요롭게는 했으나 일자리로는 잘 이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또 다른 조사에서 지체장애인은 무엇보다 직업과 연계된 프로그램을 원했고, 발달장애인은 배운 것이 실제 생활로 이어지는 교육을, 그리고 자신들을 ‘돌봄시설’이 아니라 ‘교육기관’의 학생으로 대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사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교육은 삶과 노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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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 이후의 단절은 이 요구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2025년 특수교육 통계를 보면, 그해 고등학교와 전공과를 졸업한 장애학생 8,781명 가운데 진학도 취업도 하지 못한 학생이 35.6%에 이르렀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나서는 순간, 세 명 중 한 명이 어떠한 교육적·직업적 경로에도 편입되지 못한 채 지역사회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이후의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전공과가 있지만 그 수용 규모는 매년 배출되는 졸업생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상당수의 청년 장애인이 학교를 마치자마자 ‘갈 곳 없음’의 상태에 놓인다. 이들을 받아 줄 다음 자리가 바로 평생교육이어야 하며, 그 평생교육은 배움을 넘어 일과 참여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평생교육법」이라는 전환점
이러한 오랜 과제에 응답한 것이 2025년 10월 26일 국회를 통과해 11월 11일 공포된 「장애인평생교육법」(법률 제21076호)이다. 이 법은 장애인의 평생교육만을 규율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 법률로, 2021년 첫 발의 이후 4년 6개월에 걸친 입법 과정과 장애계의 오랜 제정 운동이 맺은 결실이다. 시행일은 2027년 5월 12일이다.
이 법의 가장 큰 의미는 장애인 평생교육의 성격을 ‘시혜’에서 ‘권리’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법 제3조는 “모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동등하게 평생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배움이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는 서비스가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권리임을 처음으로 못 박은 것이다.
노동과 일터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조항은 교육과 고용, 복지를 잇는 연계 규정이다. 이 법은 장애인평생교육기관이 취업과 고용 유지에 필요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직업교육을 실제 일자리와 연계하며, 중증장애인의 노동권 확보를 위해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와 교육을 이어 주고, 지역사회 복지시설과 손잡아 교육과 복지를 함께 제공하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나아가 교육부장관이 이러한 사업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고용노동부장관·보건복지부장관과 협력체계를 구축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동안 교육·훈련·복지로 흩어져 중복과 사각지대를 낳던 사업들을 하나로 잇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학습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춘 지원의 틀도 새로 도입됐다. 학령기 특수교육의 개별화교육계획(IEP) 원리를 성인기로 확장한 ‘개인별교육지원계획’이 그것이다. 이제 학습자의 요구에서 출발해 교육 목표와 내용, 방법, 필요한 편의와 서비스를 설계하는 방식이 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 또한 국가에서 시·도, 시·군·구로 이어지는 3층 전달체계가 법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국가센터 한 곳과 일부 학습도시에 국한되던 배움의 접점이 전국 곳곳으로 넓어진다. 장애인 교육에 특화된 전문 인력인 ‘장애인평생교육사’ 자격이 새로 만들어지고, 문해교육을 이수하면 그에 상응하는 학력을 인정받는 길도 열린다.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살피는 장치도 마련됐다. 국가는 3년마다 장애인 평생교육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해마다 그 현황과 정책을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 그동안 조사마다 수치가 들쭉날쭉해 정책의 근거로 삼기 어려웠던 통계가 비로소 표준화된 기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종사자에 대한 인권교육을 의무화하고 인권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도록 한 규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요컨대 이 법은 배움을 일과 삶으로 잇기 위한 제도적 뼈대를 처음으로 갖춘 것이다.
법을 넘어, 삶의 변화로
그러나 법의 제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법조문이 곧바로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법이 약속한 권리가 모든 장애인의 일상에 실제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향이 함께 가야 한다고 봤다.
첫째, 교육을 처음부터 ‘자립과 노동’을 향해 설계해야 한다. 여가와 교양에 머물던 프로그램을, 직업교육과 일자리 연계까지 내다보는 교육으로 다시 짜야 한다. 배움이 곧 취업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배움과 일 사이에 끊긴 다리를 이어 주는 것은 설계를 통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교육기관과 고용 현장, 복지 서비스가 각자의 칸막이 안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생애를 함께 바라볼 때 그 다리는 놓인다.
둘째, 의무와 재정 사이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이 법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강하게 규정하면서도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는 대체로 재량에 맡기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전달체계 설치와 인력 배치, 서비스 제공은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할 재정 지원 조항은 대부분 “할 수 있다”는 임의규정에 그친다. 실제로 법이 통과된 바로 다음 날, 한 지역의 장애인평생교육시설에 예산 삭감이 통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법이 생겼다고 예산이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 장면이었다. 첫 기본계획에 구체적인 투자 목표를 담고, 하위법령과 조례에 재정의 기준을 분명히 새겨 넣어야 이 간극을 좁힐 수 있다.
셋째, 배움의 주인공인 당사자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앞서 발달장애인들이 ‘돌봄시설이 아니라 교육기관’을 요구했듯, 교육의 적합성은 당사자의 관점이 설계에 반영될 때 비로소 확보된다. 지역의 정책을 논의하는 협의회에 당사자가 참여하고, 통합교육과 특화교육 가운데 필요한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교육은 비로소 ‘나의 배움’이 된다. 여기에 전문 인력의 양성과 오랜 현장 경력을 지닌 이들에 대한 정당한 인정이 더해져야, 배움의 질이 담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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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다시 그 손끝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예순이 넘어 처음 이름을 쓴 그 학생은, 얼마 뒤 은행에서 스스로 서류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기 일을 처리하는 '자립'의 시작이었고, 세상과 다시 관계 맺는 '참여'의 문이었다. 배움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은 단순한 배움이 아니라 자립의 토대이자, 노동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며, 지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권리다. 배움을 향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오랜 외침이 마침내 법의 제정으로 응답받았듯, 이제 남은 과제는 그 법이 약속한 권리를 예산과 사람과 전달체계라는 실체로 채워 모든 장애인의 일상에 가닿게 하는 일이다. 배움이 일이 되고, 그 일이 다시 삶이 되는 순간까지, 함께 놓아야 할 다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 본 기사는 전문가 필진이 작성한 글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