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화 아나운서는 2006년 예상치 못한 일로 장애를 얻었다.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머물던 집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척추 신경이 손상된 사고였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최 아나운서는 세계 여러 나라를 경험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꿈을 품을 만큼 당차고 거침없는 성향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도 같은 마음으로 나아간다. 비록 휠체어에 앉은 채로지만, 그 꿈은 깊이와 넓이를 더한 듯 했다. 수국처럼 환하고 밝은 표정의 그녀를 지난 3월 만났다.
글. 편집실 사진. 홍승진
Q. 안녕하세요. 흔히 ‘휠체어를 탄 아나운서’로 알려져 있는데, 본인 소개와 근황을 들려 주세요.
안녕하세요. KBS 6기 장애인 앵커로 활동했고, 현재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최국화입니다. 방송 활동 이외에도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 인권교육 강사, 모델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요즘은 ‘장애인고용촉진대회’ 진행을 준비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장애인 고용에 기여한 분들께 포상을 드리는 자리인데, 어떤 분들에게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매우 뜻깊은 순간이죠. 매년 진행해 온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잘 전달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포상 내용이나 이름을 소개하면서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보는 분들과 받는 분들에게 더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더 철저히 준비하는 중입니다.
‘장애인고용촉진대회’를 앞두고 진행 준비로 바빴던 지난 3월의 최국화 아나운서
Q. 지난해 ‘자랑스러운 척수장애인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주는 상인데, 제게는 정말 과분하고도 귀한 상이었습니다. 무슨 큰 공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중도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과정과 위기나 힘든 순간들을 잘 지나왔다고 다독여 주시는 의미인 것 같아요. 사고 이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그 안에서 다시 방향을 찾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거든요. 그런 시간을 돌아보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수상 자체로 기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시간을 누군가가 의미 있게 바라봐 주고 있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조금 울컥하기도 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앞으로 더 잘 살아가라는 응원의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까 해요. 저처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줬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주신 상인 것 같거든요.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크고, 동시에 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상을 하나의 결과로 여기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라는 격려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척수장애인상’ 수상의 의미를 밝히는 최 아나운서
Q. 장애를 얻은 뒤 삶에서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무엇이었나요? 다시 시작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와 고민을 겪으셨는지요?
아무래도 마음의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장애에 대한 무지와 오해와 편견으로 꽉 찼을 거예요. 장애인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 왜곡된 인식이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더 큰 장벽으로 다가오더군요. 몸도 그랬지만 한동안은 심적으로 정말 괴로웠습니다.
가장 크게 느낀 변화는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는 막막함이었었어요. 장애를 얻는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조건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도 달라지고, 처음부터 적응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죠. 말 그대로 두려움의 연속인 거예요. 그래서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나에 집중해 보자”하는 마음으로 조금씩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로 연이 닿아 사회로 복귀하게 됐어요.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조금 더 포용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일을 시작한 거예요.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런 경험들이 결국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몸의 조건이 달라졌어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연결되려는 감각은 제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나 봐요. 그 덕에 인권교육 강사, 아나운서, 라디오 진행자로도 일하게 됐습니다. 또, 장애인 의류 모델도 하고 있고요. 장애 때문에 ‘스스로 제한하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여기까지 왔어요.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았던 최 아나운서의 다양한 경험
Q. 긴 재활 이후 사회로 복귀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다시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건 아무래도 가족들과 주변 분들이었어요. 살아 있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 자체가 응원이었고, 있는 그대로의 저를 소중히 여기고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힘이었죠. 그런 마음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 복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설 수 있는 자리, 다시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어야 하죠. 마침 입원해 있던 병원의 주치의 선생님께서 장애인식개선교육이라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인데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중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제 이력을 알고 계셨던 터였죠. 휠체어를 타고 교육 현장에 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지 처음에는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만나 보니 너무 좋더군요. 어떤 아이가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기도하겠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용기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조금씩 사회에 다시 적응하기 시작한 거예요.
강사로 활동하면서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해 공부도 다시 시작했어요. 장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깨달았고, 환경이 조금만 바뀌면 장애인도 충분히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절감하면서 더 깊이 배우게 됐습니다. 결국 장애학 석사과정에 도전했죠.
가르치는 일은 결국 모르는 것에 대한 ‘공부’를 전제하는 일이라, 강의를 하면 할수록 배우고 싶은 마음도 커지는 것 같아요. 장애인식개선 교육, 인권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 등 다양한 교육을 찾아 배우며 제 시간을 견뎌오지 않았나 합니다. 그 견딤이 일이 되고 삶이 된 거예요.
국립재활원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강단에 서며 제2의 삶을 시작한 최 아나운서
Q.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중국 유학 당시 한글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의 말이나 문화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대상이었는데, 일하면서도 너무 즐겁고 뿌듯했죠. 그런 걸 보면 사고 이전에도 제가 하는 일에 나름의 애정과 자부심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장애를 얻고 일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도 사실이에요. 예전에는 직업이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면, 지금은 제가 직접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일을 해보는 과정 자체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아나운서 일을 하면서도 재미있고, 강의를 하면서도 재미있고, 모델 활동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전하고,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한 반응을 들을 때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열 번 도전하면 여덟 번, 아홉 번은 잘 안되는 경우가 있기도 해요. 그런데 그 과정조차 저에게는 유의미한 경험입니다. 이렇게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더 크게 느끼게 되죠. 그래서인지 ‘워커홀릭’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이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제 일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선택해 이어가고 싶은 삶의 방식이니까요.
방송을 통해 장애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싶다는 최 아나운서
Q. 2021년 KBS 장애인 앵커로 방송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방송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평일 정오에 시작하는 뉴스의 한 코너였어요. 말 그대로 생활에 유익한 정보를 전하는 ‘생활뉴스’였지만 ‘이터븀 광시계’처럼 묵직한 소재를 다루기도 했죠. 전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세계협정시’로, 아마 우리나라가 프랑스·일본·미국·이탈리아에 이어 다섯 번째 생성 참여국이 됐다는 소식이었을 거예요. 생소한 개념을 파악하며 이해하고 흐름을 잡기 위해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데스크에서도 흡족해하셨죠.
방송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언제나 같아요. 장애가 있는 사람도 방송을 할 수 있고, 뉴스의 얼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라기보다는, 저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어요. 방송 속 제 모습을 보며 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어들고, “장애가 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아요.
실제로 장애인 택시를 이용하던 중 기사님께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운동을 하다 장애 판정을 받은 한 여학생이 저를 보고 다시 꿈을 꾸게 됐다고 하더군요. 제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각보다 큰 의미로 닿을 수 있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더 책임감을 가지고 방송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는 이유죠.
Q. 본인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장애인에게 일이 갖는 의미도 함께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지난 20년 동안 장애인 노동시장과 사회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느끼시는지,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장애인에게 일은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확인하는 중요한 통로예요. 또 일이라는 건 단순한 경제활동을 넘어, 사회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버팀목이기도 하죠. 저 역시 일을 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거든요.
20년 전과 비교하면 장애인 노동시장도 조금씩은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장애인 고용에 대한 인식이 예전보다 나아진 부분도 있고, 제도적인 기반도 이전보다 조금은 넓어졌다고 생각해요. 이동 환경만 봐도 대중교통이나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경사로, 장애인 주차구역 같은 것들이 예전보다 많이 개선됐죠.
하지만 여전히 “적합한 업무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장애인 고용을 망설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장애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죠. 그러니 조금 더 알고, 함께 찾아가고자 노력한다면 분명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장애인 고용은 누군가를 돕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 일을 통해 그 가치를 계속 전하고 싶습니다.
Q. 힘든 순간마다 붙잡게 되는 말이나 마음이 있다면요?
처음부터 제 동생이 해줬던 말이 있어요. “언니는 다 잘한다, 언니는 다 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는 바람에서 나온 말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의 상황과 마음 상태가 그 말을 그 뜻 그대로 흡수했던 것 같아요. 결국 그 말을 들으면서 조금씩 ‘나도 괜찮은 사람일 수 있겠다’고 믿게 됐죠.
물론 지금도 행사나 방송에서 배제되거나 장애 때문에 리스크가 예상된다는 말을 들을 때면 정말 힘이 빠지곤 합니다. 그래도 그런 경험들조차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좌절과 도전을 반복하면서도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렇게 견뎌왔고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제 삶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 그리고 독자분들에게 하실 말씀 있으면 전해 주세요.
거창한 최종 목표를 정해 두기보다는, 지금 제게 주어진 일들을 조금 더 성실하게, 그리고 더 잘 해내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다음에 가야 할 길도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독자분들도 새로운 기회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손을 한 번 잡아 보셨으면 해요.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있지만, 곁에서 힘이 되어 주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더라고요. 장애인고용공단 같은 기관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네요. 부디 스스로를 너무 위축시키지 말고, 자신이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을 놓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그 마음을 잊지 않으며 계속 용기를 내 나아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