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집중호우, 태풍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재난을 마주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에게 기후위기는 이동과 정보, 의료와 생존이 동시에 위협받는 인권의 문제다. 세계 각국은 이미 기후정의를 바탕으로 장애포용적 재난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출발선에 서 있다. 기후위기 시대, 장애인을 가장 먼저 보호하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글. 이정주 센터장(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 ‘누림’)
기후위기 시대,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사람들
작년 여름,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폭염 대응 상황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벽면 모니터에는 실시간 온열질환 발생 지도가 떠 있었고, 담당 공무원은 취약계층 안부 확인 현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장애유형별 대응 매뉴얼은 없었다. 전동휠체어 배터리가 방전되면 누가 충전을 지원하는지, 인공호흡기를 쓰는 재가 장애인의 정전 대비책은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묻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후위기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데, 정작 가장 먼저 위험해질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계획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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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애인이 먼저 위험해지는가
기후위기로 인한 폭염, 홍수, 태풍은 모두를 덮칠 수 있지만 그 무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휠체어를 쓰는 사람은 계단으로 대피할 수 없고, 시각장애인은 낯선 대피 경로를 혼자 찾기 어렵다. 청각장애인에게 사이렌은 존재하지 않는 소리이며, 발달장애인에게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공포 그 자체다. 재난은 누구에게나 골든타임이 있지만, 장애인의 골든타임은 그보다 더 짧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전이다. 인공호흡기, 산소발생기, 전동휠체어, 투석기는 모두 전기를 먹고 산다. 태풍으로 전력이 끊기는 순간, 이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바뀐다. 여기에 체온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심장·호흡기 질환을 동반한 경우가 많은 장애인에게 폭염은 세계보건기구가 지적하듯 가장 치명적인 기후 위험 요인이 된다. 재난문자가 글자로만 오고 수어와 음성안내, 쉬운 정보가 빠져 있다면, 정보를 받지 못해 죽는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위험을 통과한 뒤에도, 낮은 소득과 낮은 보험 가입률, 열악한 주거환경을 가진 장애인은 복구의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진다.
기후정의라는 이름의 인권
국제사회는 이러한 불균형을 ‘기후정의(Climate Justic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후위기의 피해는 유독 장애인, 노인, 아동, 저소득층에게는 더 큰 재앙이 된다. 유엔이 기후변화 대응을 환경정책이 아니라 인권정책으로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파리협정 당사국의 기후정책을 살펴보면, 생각만큼 이 문제에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몇몇 나라는 취약계층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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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포용적 재난관리의 미국·일본
미국은 연방재난관리청(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FEMA)을 중심으로 장애포용적 재난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FEMA 산하 장애통합 및 조정실(Office of Disability Integration and Coordination, ODIC)은 재난의 예방·대비·대응·복구 전 과정에서 장애인의 접근성과 참여를 보장하도록 지원하며, 접근 가능한 대피소 운영, 보조기기 지원, 재난정보 접근성 확보 등을 통해 기후위기 시대 장애인의 안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2025년부터 연방 대피지원 지침에 장애인을 포함하여 위기 상황 시 기능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핵심 교통수단을 사전에 파악하도록 하였다. 기후위기 관점에서 해석하면, 미국의 대응은 단순히 “재난 때 장애인을 구한다”는 수준이 아니다. 교통, 이동 등 접근성을 재난관리의 기본조건 삼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다만 교통만을 언급할 뿐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주거, 의료·전력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한계도 있다.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 홍수 피해가 빈번한 일본은 혼자 대피하기 어려운 고령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개인별 피난계획(Personal Emergency Plan)을 세워둔다. 재난 시 “누가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미리 정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개인별 피난계획은 단순한 장애인 명부가 아니다. 당사자의 거주지와 장애 특성, 대피장소, 대피경로, 연락 방법, 실제로 대피를 도울 사람과 필요한 지원을 사전에 정하는 제도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던 2021년 이후에는 지방자치단체가 피난지원 필요자에 대한 개인별 계획을 반드시 마련하도록 제도적 책임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같은 지체장애인이라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주택에 사는 사람,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가족과 거주하는 사람의 지원 필요는 다르다. 이는 형식적으로 같은 대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실제로 대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실질적 평등(substantive equality)의 상징으로 보인다. 다만 이 계획을 작성했더라도 활동지원인력과 운송수단, 복지피난소, 의료기관이 실제로 얼마나 잘 연결되는지는 다소 의문이기는 하다.
개인의 권리와 참여 중심의 호주·캐나다
호주의 경우 자신의 위험과 지원 필요를 직접 설계하는 ‘사람 중심 긴급상황 대비계획 (Person-Centred Emergency Preparedness, P-CEP)’을 가지고 있다. P-CEP는 장애인이 자신의 역량과 지원 필요를 스스로 점검하고, 가족·이웃·지원기관과 함께 개인별 비상계획을 작성하도록 돕는다. 호주 재난회복력연구소(Australian Institute for Disaster Resilience, AIDR)는 이를 장애인, 응급관리기관, 보건 분야가 공동 설계한 장애포괄적 재난위험경감 도구(Disability Inclusive Disaster Risk Reduction, DIDRR)를 만들었다. P-CEP에서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 수동적인 보호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사자가 평소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재난 시 어떤 기능이 중단될 수 있는지, 누구와 어떻게 행동할지를 직접 확인한다. 계획은 이동과 의사소통뿐 아니라 건강관리, 개인지원, 보조기기, 교통, 생활환경과 사회적 연결망까지 포괄한다. 재난의 경우에도 당사자의 권리에 기반하여 스스로 재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가 설계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다만 P-CEP는 당사자의 자기 인식 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외에도 캐나다는 장애인을 ‘기후취약인구(Climate Vulnerable Population)’로 공식 분류해 산불과 홍수 시 접근 가능한 쉼터와 이동지원을 정책 문서에 정의하고 있다. 독일은 장애인 재난훈련과 경보체계, 복지시설의 비상전력 확보를 제도화했고, 뉴질랜드는 원주민과 장애인을 함께 고려하는 포용적 재난위험경감 정책을 운영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각 나라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장애인을 재난 대응에 있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인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고, 기후정의 원칙을 제도화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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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현주소
우리나라도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재난안전 정책과 기후적응 정책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최근에는 기후위기 적응대책과 재난안전관리 체계에서도 취약계층 보호와 정보접근성 강화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장애인의 다양한 특성과 지원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는 수준까지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정책과 제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함께 검토할 수 있는 과제를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애유형별 대피 매뉴얼을 재난 유형별로 구체화해야 한다. 둘째, 활동지원사가 재난 상황에서도 배치되는 개인별 재난계획(Personal Emergency Plan)을 의무화해야 한다. 셋째, 인공호흡기·산소발생기·전동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비상전원 확보 체계를 지자체 단위로 구축해야 한다. 넷째, 수어와 쉬운 정보를 포함한 재난문자 표준을 법제화해야 한다. 다섯째, 장애인복지관을 지역 기후대피소와 연계해 평상시 서비스가 재난 시에도 우선 대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정해야 한다. 여섯째, 폭염철 장애인 안부확인 체계를 상시 운영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일곱째, 지방정부는 장애인 기후취약성 지도를 작성해 어디에 누가 사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통합돌봄, 주거지원, 활동지원, 의료연속성, 정보접근성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내야 하는 장애인권 정책의 최전선이 되었다. 다음 폭염이, 다음 태풍이 오기 전에 앞서 방문했던 어느 지자체 상황실에 장애인을 위한 대응체계도가 마련되길 바란다. 그것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요구하는 생명권과 안전권을, 문서가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 실현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