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다’는 말에는 “맑은 하늘빛이나 풀빛과 같은 색을 띤 상태에 있다”는 뜻이 있다. 푸르메소셜팜의 시작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름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한 부모가 내어놓은 땅에 수많은 사람의 나눔이 더해졌고, 그 위에 발달장애 청년들이 일하며 자신의 삶을 키워가는 일터가 자리 잡았다. 이곳의 햇빛 아래에서 방울토마토가 자라는 동안, 청년들도 저마다 맡은 일을 익히며 자립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푸르메소셜팜의 ‘푸름’은 한때의 빛깔이나 순간의 희망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름에 담은 의미처럼 한 사람의 가능성이 오래도록 자라날 수 있는 삶의 풍경이 된다.
글. 편집실 사진. 홍승진
희망을 심어 만든
첫 번째 스마트팜
푸르메소셜팜의 시작은 발달장애 청년들에게 좋은 일터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어느 부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 부부는 발달장애인인 아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농장을 일궈왔지만,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지속하기 어렵다는 생각 끝에 땅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기업의 후원과 공공의 협력이 더해졌다. 푸르메재단을 중심으로 여주시와 한국지역난방공사가 공동 출자해 국내 최초의 컨소시엄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인 ㈜푸르메여주팜을 설립했고, 한국장애인고용공단도 생산시설 건립을 지원했다. SK하이닉스는 건립비 지원과 생산품 구매 등을 통해 농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 힘을 보탰다. 그렇게 약 2년에 걸친 조성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는 게 조영수 대표의 설명이다.
스마트팜 온실에서 방울토마토의 생육 상태를 살피는 직원들
“‘무이(無異)’라는 두 글자는 ‘다르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발달장애인의 가능성과 꿈도 동일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 ‘무이숲’이에요. 서로 다른 나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함께 자라나는 숲처럼, 푸르메소셜팜도 누군가의 가능성과 꿈이 자라는 공간이길 바랐죠.”
그 바람은 이제 눈에 보이는 일터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조 대표의 말에 의하면, 약 4,000평의 부지에 자리한 푸르메소셜팜은 이제 스마트팜과 생산가공시설, 교육센터에 베이커리카페 ‘무이숲’까지 들어선 든든한 자립의 터전을 이루었다. 2026년 현재 55명의 발달장애인이 스마트팜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납품하는 것은 물론, 체험과 견학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연간 약 32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단순히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며 지속가능한 일터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셈이다.
푸르메소셜팜의 약도(좌)와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상징하는 카페·문화공간 무이숲(우)
일과 삶이 함께 자라는 터전
푸르메소셜팜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운영된다. 그중 가장 먼저 움직이는 공간은 방울토마토가 자라는 스마트팜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토마토를 수확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줄기를 유인줄에 올리고, 불필요한 곁순을 제거하며, 병충해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등 한 작물이 자라는 전 과정을 함께한다. 토마토가 스스로 곧게 자랄 수 있도록 줄을 잡아주고 때에 맞춰 손질해야 하는 만큼,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작물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재배와 안전, 위생, 병충해 등에 관한 교육도 꾸준히 이루어진다.
조 대표는 농장에서의 일이 발달장애 청년들과 잘 맞는 지점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부담이 따르지만, 식물을 돌보는 동안에는 자신의 속도로 일에 집중하며 그 생장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곁순을 따주고 내일은 조금 자란 모습을 확인하며, 그렇게 자신이 돌본 작물에서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함께한다. 누군가의 시선에 맞추기보다 자신이 맡은 식물과 오롯이 마주하는 것이다.
세척된 방울토마토를 꼼꼼히 선별해 용기에 나눠 담는 포장 공정
수확을 마친 방울토마토의 다음 여정은 생산·가공 공간에서 이어진다. 이곳의 청년들은 토마토의 상태와 크기를 살펴 선별하고, 깨끗이 세척한 뒤 꼭지를 하나씩 제거한다. 이후 용기 크기에 따라 정해진 무게를 맞춰 담고 포장을 마치면 비로소 하나의 상품이 완성된다. 작은 토마토 한 알을 다루는 일이지만 어느 하나 대충 넘길 수 없는 공정이다. 특히 꼭지를 제거하는 작업은 손이 많이 들어 일반 유통 과정에서는 생략되기도 하지만, 꼭지 주변에 남을 수 있는 이물질이나 세균 번식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푸르메소셜팜에서는 꼼꼼히 거친다.
이러한 가공 과정에는 안정적인 일거리를 만드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조 대표의 말이다. 방울토마토는 계절과 생육 상태에 따라 생산량의 차이가 큰데, 그렇다 보니 재배지를 정리하는 시기에는 수확할 물량이 줄어들기 마련이라고 한다. 이때 푸르메소셜팜은 외부 농가나 위탁재배 농장에서 생산한 토마토를 들여와 포장 작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부족한 수확량을 보충하는 것이다. 농사일의 계절성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안에서도 청년들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가는 것. 이렇듯 ‘내 아이’의 자립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푸르메소셜팜의 서사는, 계절과 상관없이 일거리를 이어 붙이는 세심한 실천 가운데 이어지고 있었다.
네 시간의 일, 이후 성장의 길
푸르메소셜팜의 하루는 네 시간의 근무로 끝나지 않는다. 조 대표는 직업을 오래 유지하려면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일 밖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에 직원들은 근무를 마친 뒤 장애인주간활동서비스와 연계해 문화·여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직원들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체험홈이나 자립홈 등과 연결된다. 회사가 직원의 삶을 모두 책임지는 대신, 지역의 전문기관과 역할을 나누며 일과 일상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다.
주간활동서비스의 프로그램도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푸르메소셜팜이 특히 요청한 것은 ‘이미지메이킹’ 교육이다. 손톱을 정리하고 머리를 감는 법부터 면도, 단정한 옷차림 같은 개인위생 관리, 건강한 식습관과 체형 관리까지 직장생활을 오래 이어가는 데 필요한 생활기술을 익힌다. 퇴근 이후의 건강과 경제생활, 이성 관계처럼 회사 안에서 세세히 살피기 어려운 문제 역시 연계기관과 소통하며 필요한 지원을 이어간다.
여가를 보내는 방식도 조금 다르다. 정해진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직원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서로 이야기하고 활동을 정하는, 일종의 ‘청년 동아리’에 가깝게 운영된다. 무엇을 할지 스스로 선택하고 함께 계획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여가 역시 누군가가 마련해 주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시간이 된다. 일터에서 맡은 일을 해내는 경험과 일 밖에서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이 함께 쌓여야 비로소 자립도 한 걸음 가까워진다는 것이 푸르메소셜팜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교육과 문화, 휴식과 만남이 어우러지는 푸르메소셜팜의 세미나 공간(좌)과 카페 내 서가(우)
월급 너머, 미래를 그리다
일을 갖는다는 것은 매달 월급을 받는 것 이상의 변화를 만든다. 푸르메소셜팜이 2025년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도 그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가장 많이 꼽힌 미래의 꿈은 ‘직업 전문성’으로, 전체 응답의 27%를 차지했다. “다른 사람에게 재배법을 알려주고 싶어요”, “재배지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라는 답변처럼 지금 하는 일을 더 잘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이 익힌 기술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바람도 나타났다.
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응답은 13%였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싶어요”, “자립하고 싶어요”라는 소망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건물주가 되고 싶어요”라는 유쾌한 목표까지 저마다 그려놓은 미래의 모습도 달랐다. 또 11%는 결혼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을 자신의 꿈으로 꼽았다.
조 대표가 주목하는 것은 꿈의 크기보다 청년들이 스스로 ‘다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먼저 독립해 살아가는 동료를 보며 “나도 자립하고 싶다”고 말하는 직원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힘으로 번 월급이 생기고, 자신이 잘하는 일이 생기면서 오늘 이후의 삶도 조금씩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재배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미래이고, 누군가에게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미래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독립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미래다. 푸르메소셜팜에서 일이 만들어내는 가장 값진 결실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려볼 수 있게 되는 것. 월급 너머에서 시작되는 그 미래까지가 이곳이 키우고 있는 또 하나의 ‘수확’이다.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지만, 푸르메소셜팜이 수확하는 진짜 열매는 발달장애 청년들의 가능성과 그 부모님들의 희망일 겁니다. 여기에서 일하는 한 사람의 삶이 달라지고,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그런 변화들이 하나둘 이어졌으면 해요. 이곳에서 맺힌 작은 열매들이 담장을 넘어 지역으로, 더 넓은 사회로 퍼져 나가고, 결국에는 장애인의 일과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조금씩 바꿔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조영수 대표
무이숲을 통해 푸르메소셜팜을 알게 되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분위기 좋은 대형 카페를 찾았다가 매장 안의 영상과 홍보물, 체험·견학 프로그램 등으로 그 배경을 알게 되는 경우죠. 가치에 공감해 다시 찾거나 주변에 소개하는 분들도 하나둘 늘고 있어요. 감사한 일이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묵직해 집니다. 농지법과 상법, 세법, 장애인복지법은 물론 지역의 특수한 여건까지 두루 살피며 끊임없이 해법을 찾게 되는 동력이기도 하고요. 언젠가 다른 지역에도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장애인 일터와 장애인표준사업장이 더 많이 생겨나, 서로 운영 경험을 나누고 필요한 제도 개선에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