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Dot)’은 작은 점 하나를 뜻한다. 시각장애인이 손끝으로 세상을 읽는 점자 역시 작은 점에서 시작된다. 주식회사 닷(Dot Inc.)이라는 이름에는 기술을 통해 정보의 장벽을 낮추고, 누구나 세상과 연결될 수 있게 하겠다는 김주윤 대표의 뜻이 담겨 있다. 가장 소외된 사람에게 필요한 기술부터 만들어 가겠다는 다짐. 작은 점 하나에서 시작된 닷의 도전은 오늘도 더 넓은 세상을 향한다. 그 도전의 결실 가운데 하나가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정보의 세계를 열어주는 촉각 디스플레이 ‘닷 패드(Dot Pad)’다.
글. 편집실 사진. 홍승진
Q.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대표님께서는 어린 시절 어떤 꿈을 꾸셨나요? 성장 과정에서 지금의 삶과 일에 영향을 준 경험이나 가치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주식회사 닷(Dot)의 대표 김주윤입니다. 발명가 기질이 있는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덕분에 저 역시 떠오르는 것을 기록하거나 뭐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어요. 발명 노트를 가지고 있을 정도였죠. 고등학교 때 창업을 꿈꾸긴 했지만, 장애 문제를 해결하거나 누군가를 돕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서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위인전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창업자인 손정의 회장의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미국 유학 시절 새로운 아이디어로 사업을 시작했다기에 저도 직접 도전해 보자고 결심했거든요.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한 방향이 있었던 건 아닌데, 언젠가는 제가 만든 기술과 사업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주식회사 닷 김주윤 대표
Q.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닷을 창업하기까지 어떤 경험과 고민이 있었을까요?
유학 시절 세 차례 정도 소프트웨어 창업에 도전했습니다. 공유경제가 주목받던 시기라 트럭 공유 서비스와 같은 사업을 구상했어요.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었고요. 그런데 사업을 추진하면서 정작 제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창업하려는지 의문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우연히 지체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약 2년 동안 함께 생활하게 됐는데, 그때 그들을 위해 강의실을 배정하고 필요한 환경을 마련하는 대학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비로소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죠. 특히 우연히 접한 점자 성경책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인데, 일반 성경책 스물 여덟 권을 포개놓은 듯 말이 안 되는 두께였거든요.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직접 만나면서 보조공학기기를 구하거나 지원받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전 세계적으로 필요한 기술이지만 시장 규모가 작아 개발에 더디다는 이야기도 접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사회적인 의미도, 기업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2014년 닷을 설립하게 된 거예요.
Q. 닷 패드는 기존 점자정보기기와 어떤 차이가 있으며, 어떤 원리로 작동하나요? 실제 활용 사례도 소개해 주세요.
닷 패드는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한 촉각 디스플레이예요. 기존 점자정보기기가 주로 글자를 한 줄씩 표시하는 방식이었다면, 닷 패드는 작은 촉각 셀을 평면으로 배열해 여러 줄의 점자는 물론 그림과 도형, 지도와 그래프까지 표현할 수 있죠. 기기 표면의 작은 점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형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디지털 화면이 바뀌듯 손끝으로 읽는 정보도 달라지는 겁니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교육 현장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수학 그래프의 모양을 말로 설명 듣는 것과 직접 만져보는 것은 다르니까요. 시각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닷 패드를 활용하면 디지털 자료를 촉각 이미지로 구현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실이나 종이로 교구를 만들던 시간과 노력을 오롯이 수업 준비에 쏟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최근에는 AI와 결합해 이용자가 음성으로 원하는 그림이나 그래프를 요청하면 촉각 이미지로 생성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어요.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정보를 스스로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촉각 디스플레이 ‘닷 패드’(좌)와 핵심 기술인 초소형 점자·촉각 셀 모듈(우)
Q. 실제 이용자들과 만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험이나 반응이 궁금합니다. 그런 만남이 기술 개발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나요?
몇 년 전 미국에서 만난 한 시각장애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그분의 아들도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기린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역시 기린을 본 적이 없잖아요.
당시 저희는 사람이 직접 촉각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기존 이미지를 변환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이용자가 궁금해하는 것을 그때그때 만들어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이후 AI를 활용해 촉각 콘텐츠를 생성하는 기술 연구로 이어졌고, 지금까지 발전시켜 왔습니다.
자신이 늘 해오던 서명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 처음 손끝으로 확인한 시각장애인의 반응도 기억에 남아요. 미키마우스나 익숙한 로고의 형태를 처음 만져보고 즐거워하는 분들도 있었고요. 이런 경험으로 기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 이상의, 세상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대만큼 비판과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뎠으며, 그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어요. 대학생 때 창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당사자들조차 저희가 정말 이런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새로운 기술이 소개되면 기대도 커지는데, 실제 제품이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요. 기다리는 분들에게 실망을 드리기도 했고, 초기 제품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기에 그런 반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제 생각을 돌아봤던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한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돕기보다 누구나 제약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된 거죠.
Q. 장애 당사자의 경험과 의견은 기술 개발에 어떻게 반영하고 계신가요? 실제 사용자들의 반응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을 개발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제 이용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문제를 알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요. 제품을 개발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요구를 인식하게 되면서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온 경우죠. 초기 제품에서는 반응속도나 발열 등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를 보완하면서 촉각 셀의 작동속도와 내구성을 높였습니다.
또, 눈으로 보기에 정교한 이미지가 반드시 손끝으로 이해하기 좋은 것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중요한 윤곽과 특징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그 차이를 실제 이용자들의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것 같아요.
그래픽 정보를 촉각으로 전달하는 ‘닷 패드’의 활용 모습
기술의 활용 범위도 시각장애인에게만 한정하지 않으려고 해요. 실제로 무장애 키오스크를 개발할 때도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등 다양한 이용자의 요구를 고려했습니다. 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접근성 기준을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Q. 장애인의 교육과 취업에서도 정보접근성은 중요한 과제입니다. 닷의 기술이 장애인의 진로 선택과 직업생활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시각장애 학생들이 수학이나 과학을 배울 때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그래프나 도형 같은 시각적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제약은 학습뿐 아니라 대학의 전공 선택과 이후 직업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해외 대학에서도 시각장애 학생에게 경제학의 수요·공급 곡선이나 컴퓨터공학 관련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있거든요.
저희는 이런 환경을 바꾸고 싶어요. 학생 때부터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다면 진로 선택의 폭도 넓어지니까요.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분들이 기존의 직업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회계 업무를 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시각장애가 생겼다고 해서 엑셀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익숙한 업무 프로그램을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 필요하죠.
앞으로는 AI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기존 보조공학기기는 사용법을 익히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만, AI와 결합하면 원하는 기능을 말로 요청하고 개인의 필요에 맞춰 활용하는 것도 가능해지죠. 장애인의 재활과 직업 복귀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고, 이전에는 도전하기 어려웠던 업무에도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접근성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상한 CES 혁신상 상패(좌)와 프리 갈리앵(Prix Galien) 수상 관련 메달 및 인증서(우)
Q.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접근성과 포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정작 필요한 사람이 사용할 수 없다면 그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키오스크가 대표적인 사례예요. 많은 사람에게는 편리한 기기지만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일부 이용자에게는 오히려 장벽이 되기도 하잖아요.
저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자기기뿐 아니라 무장애 키오스크와 접근성 안내 시스템 등으로 기술을 확장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다양한 장애 유형과 이용 환경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정 장애 유형에 맞춘 기능을 추가하거나 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술의 보급도 중요해요. 해외 여러 교육기관에서는 새로운 촉각 기술을 활용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학교에 기기가 보급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사용법을 익히고 수업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닷 패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 선생님도 직접 만든 교육자료와 활용 경험을 다른 교사들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결국 새로운 기술이 현장에 정착하려면 기업뿐 아니라 교육기관과 정부, 관련 기관들의 관심과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같아요.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서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까지 기술 혁신의 과정이니까요.
Q. 창업 이후 지금까지 대표님 자신에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반대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신념이나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초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처음 시작할 때도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동일한 마음입니다. 다만 처음에는 눈앞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작은 물컵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던 때를 지나 이제 양동이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된 느낌이에요. 점자를 표시하는 기술에서 시작해 이제는 AI와 결합해 그림과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고 교육뿐 아니라 업무와 일상, 문화생활까지 활용 범위를 넓혀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넓혀 가는 과정에서 같은 비전으로 함께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저 혼자서는 이루기 어려운 일도 뜻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조금씩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정말 가치 있는 일이고 가고자 하는 길이 옳다면, 속도보다 방향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Q. 그렇다면 닷의 방향은 무엇인가요? 기업 차원의 성장뿐 아니라 대표님이 궁극적으로 만들어 가고 싶은 변화는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앞으로 교육과 업무, 재활, 문화생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의 가능성을 넓혀 가고 싶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기기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기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특히 보조공학기기가 특정한 사람만 사용하는 별도의 기기가 아니라,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일상적인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가격도 중요해요. 아직은 생산 규모가 작아 제품 가격이 높은 편이지만, 앞으로 대량생산을 통해 일반 노트북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겠죠.
공공시설과 교통시설, 학교와 직장에서도 접근성 기술이 자연스럽게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궁극적으로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정보를 접하거나 이동하고, 배우고 일하는 데 불필요한 제약을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