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원하는 일을 선택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기회뿐 아니라 그 기회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보조공학과 인공지능(AI)은 개인의 특성과 필요에 맞춰 의사소통과 정보 접근, 작업환경의 장벽을 낮추는 중요한 수단이다. 해외의 다양한 활용 사례를 통해 기술이 장애인의 일할 권리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지원의 방향을 모색한다.
글. 이정주 센터장(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 ‘누림’)
들어가며
올해 제정된 「장애인권리보장법」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더라도 그 기회에 접근할 수 없다면 평등은 실현되기 어렵다. 장애인에게는 의사소통과 정보 접근, 이동과 작업환경의 장벽을 낮추는 지원이 함께 필요하다.
실질적 평등(Substantive Equality)은 개인의 상황과 필요를 고려해 기회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목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정보 접근 기술을, 청각장애인에게 실시간 문자 통역을, 발달장애인에게 보완대체의사소통(AAC) 보조기기를 제공하는 것은 이러한 평등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보조공학(AT, Assistive Technology)과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의 새로움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 당사자가 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가이다. 해외 사례를 통해 개인별 기술 지원이 일터의 장벽을 어떻게 낮추는지 살펴본다.
해외 사례: 사람과 일터에 맞추는 기술
미국 테네시주의 한 공무원은 루게릭병으로 발화 능력이 약해지면서 주민 및 동료와 소통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대응은 업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AAC와 휴대용 문자 의사소통 기기를 활용해 그가 원하던 대민 업무를 계속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 노동부가 지원하는 JAN(Job Accommodation Network)의 상담은 필요한 편의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발화의 어려움을 곧바로 업무 수행의 불가능으로 판단하지 않고, 소통 방식을 조정한 사례다.
영국의 AbilityNet 사례에는 사고 후 허리 통증으로 오래 앉아 있기 어려웠던 사무직 근로자가 등장한다. 누운 상태에서도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받아쓰기 소프트웨어와 무선 헤드셋을 활용했다. 영국 정부의 Access to Work는 장비 사용법을 익히는 훈련 비용도 지원했다고 한다. 장비를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호주의 JobAccess를 통한 고용지원기금(EAF) 지원 사례에서는 난청이 있는 간호사의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병원 내 전화·컴퓨터 시스템과 연결했다. 또한 가구공장의 농인 근로자를 위해 비상 시각경보등을 설치하고 동료들에게 기초 수어 교육을 제공했다. 당사자와 수어통역사, 사업주 등이 참여한 현장 평가를 토대로 필요한 장비와 대응 방식을 마련한 것이다. 개인의 보조기기와 조직의 업무·안전 체계를 함께 조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디지털 접근성을 지원하는 영국의 AbilityNet
일본의 분신로봇카페 DAWN ⓒ vr-comm.jp
독일 연방노동사회부가 지원한 KI.ASSIST(2019~2022)는 AI 보조기술을 현장에서 시험한 사업이다. 대표적인 스마트글라스는 작업 순서를 사진·영상·문자로 보여주고 음성으로 안내한다. 연구진은 기술이 현장에 정착하려면 교육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업 지시를 이해하고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부터 바꿀 수 있다는 접근이다.
일본 도쿄의 분신로봇카페 DAWN에서는 중증장애나 난치병 등으로 외출이 어려운 사람이 집이나 병실에서 로봇 OriHime을 원격으로 조작해 손님을 응대한다. 사람이 로봇을 매개로 고객을 만나고 일하는 것이다. 출근이 어렵다는 이유로 일할 가능성을 닫지 않고, 일하는 장소와 방식을 새롭게 설계한 사례다.
이들 사례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을 기존 업무 방식에 맞추기보다 기술과 환경을 사람에게 맞춘다는 점이다. 모든 지원이 AI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출발점은 같다. 당사자가 겪는 구체적인 어려움을 확인하고, 필요한 도구와 교육, 조직의 협력을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AI 기반 의사소통 기술의 가능성과 과제
AI의 기여가 주목되는 영역 중 하나는 음성인식이다. 일반적인 음성인식 서비스는 뇌성마비나 뇌졸중 후유증 등으로 불분명해진 발화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스라엘 기업 Voiceitt가 개발한 기술은 이러한 ‘비표준 발화(non-standard speech)’를 인식하도록 설계됐다. 개인별 음성 특성을 학습해 다른 사람이나 디지털 기기와의 소통을 돕는다. 당사자의 말을 기술이 이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개인 맞춤형 지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곧바로 일터에서의 활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OECD 보고서는 장애인의 노동시장 참여를 돕는 기술 142건 중 77%가 AI 없이는 구현될 수 없는 기술이라고 소개하면서도, 장애인 당사자의 개발 과정 참여 부족을 과제로 지적했다. 당사자가 빠진 기술 개발은 실제 업무에서 필요한 기능과 사용 조건을 놓칠 수 있다.
직장 내 도입에도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업무 용어를 등록하고 인식 오류를 수정하며 회사 시스템과 연결해야 한다. 회의 내용이나 업무 정보를 AI 서비스에 입력하려면 정보 보호 기준과 조직 내 합의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보조기기를 구매할 수 있는지만큼이나 사업주의 관심, 동료의 협력, 사용 훈련이 중요하다.
Voiceitt를 활용해 CERN ATLAS 검출기 데이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클레어 말론 박사 (출처 : CNN)
기술을 권리의 실현으로 연결하려면
기술의 위대함은 장애인을 비장애인처럼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 AT와 AI의 가치는 장애인이 원하는 삶과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기여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를 위해 지원의 단위를 기기 한 대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된다. 개인별 필요 평가, 적합한 기술의 선택, 업무환경과의 연결, 사용 교육, 지속적인 점검까지 이어져야 한다.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일반논평 제6호(2018)에서 ‘포용적 평등’을 제시했고, 일반논평 제8호(2022)에서는 일터의 정당한 편의를 당사자와 협의해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원의 기준은 공급자가 제공할 수 있는 장비 목록보다 당사자가 어떤 일을 원하고 어디에서 어려움을 겪는지에 두어야 한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의 시행을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관점이다. 장애로 일을 포기하기 전에 입력 방식과 의사소통, 작업환경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기술이 개인의 필요에 맞게 제공되고 실제 일터에서 사용될 때, 실질적 평등은 선언을 넘어 일상의 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