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일잘러

다운증후군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

“그림을 통해
세상을 만나다”

글. 임채홍
사진. 신현균

  •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된 10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은혜 캐리커처 작가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환한 미소로 반겨준 정은혜 작가는 특유의 긍정적인 분위기를 보였다. ‘서로를 만난 순간’을 그리고 싶다는 그녀는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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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혜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Outsider Artist,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예술가)다. 특유의 그림체와 색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는 지난해 미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다운증후군마저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승화시켜 전 세계를 사로잡은 그녀의 그림과 인생에 대해 직접 알아보았다.

정은혜 작가
  • 그림, 세상을 잇다

  •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정은혜 작가. 그녀는 어떻게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당시 23살이었던 정은혜 작가는 다운증후군으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때는 사회적으로 고립되며 우울했어요. 남들과 다르단 이유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마음의 병이 생겼던 것 같아요.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다 같이 힘들었죠.”
    그러다 정은혜 작가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실을 돕게 되며 운명처럼 그림과 만나게 됐다고. “당시 화실에 아이들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그림을 잘 그려서 샘도 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청소하다 말고 잡지에서 향수를 들고 있는 한 여자를 그리게 됐는데 그게 제 첫 그림이에요.”
    이 일을 시작으로 그녀는 본격적으로 캐리커처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는 부모님이 한 번도 자신에게 그림을 잘 그리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부모님들은 자식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학원부터 보내거나 그림 실력을 올리려고 하실 거예요. 하지만 제 부모님은 그런 적이 없으세요. 오히려 제가 그림을 통해 웃고 사람을 만나는 것에 더 의미를 두셨어요.”
    스스로 그림을 그리며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를 알게 됐다는 정은혜 작가. 그녀에게 그림은 진짜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알게 해준 고마운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그녀는 지금까지 약 4,500명의 캐리커처를 그려왔다. “저는 사람 자체를 좋아해요.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서 사람을 그리는 거예요. 앞으로 몇 명을 그리겠다는 구체적인 숫자는 정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게 제 목표입니다.”
    그녀는 대상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천천히 보며 그리는 게 자신의 작업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작품 옆에는 사진을 찍었던 날짜와 대상의 이름을 꼭 들어간다고도 강조했다. “제 작품은 저와 만났던 그 사람과의 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찰나의 느낌을 기억하고 싶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보며 서로가 그때를 기억하게 되는 거죠.”

    • 정은혜 작가가 그린 캐리커처 작품

      정은혜 작가가 그린 캐리커처 작품

    • 인터뷰 중 미소를 보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인터뷰 중 미소를 보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저는 사람 자체를 좋아해요.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서 사람을
그리는 거예요.”

  • 배우로서의 삶

  • “안녕하세요. 캐리커처 작가이자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정은혜입니다.” 정은혜 작가가 자신을 소개할 때 한 말이다.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그녀는 팬도 생기고 평소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당시에 제가 개인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노희경 작가님이 직접 오셔서 그림도 보시면서 섭외 제안을 해주셨어요.”
    이전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다섯 개의 시선’에 주연으로 연기를 펼친 적이 있었던 그녀는 드라마 제안에 응하게 된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받았어요. 전시나 작업 공간에 오셔서 응원도 해주시고 길에서 만나면 사진이나 사인 요청도 많았어요.”
    이런 사람들의 관심과 응원이 고마웠지만 나중엔 살짝 힘들기도 했다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응원해 주시는 분들과 대화도 하고 사진도 찍어드리려고 하다 보니 신체적으로 힘들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 상황을 즐기고 이해하다 보니 재밌었어요. 앞으로도 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 예술도 노동이다

  • 캐리커처 작가와 배우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진행 중인 정은혜 작가.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쉼 없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예술도 노동이다’ 팀을 꼽았다. ‘예술도 노동이다’는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노동자 그룹으로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정은혜 작가는 그동안 혼자 그림을 그려온 게 아니라 이들이 옆에 있어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전 9시부터 1시까지가 저희 업무 시간이에요. 그런데 다들 1시까지 일을 한 후에도, 6시까지 남아 작업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요. 그러면서 서로 돈독해지면서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술도 노동이다’에 속해있는 팀원들은 이전까지는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예술가들이다. ‘예술도 노동이다’는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단순한 업무보단, 세상과 소통하고 잘할 수 있는 일로 예술•문화를 생각했고 이들을 정식 노동자로 월급과 복지를 지원하는 중이다.
    정은혜 작가는 이런 동료들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활동들과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 모여 제 삶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이런 방식으로 저만의 세상이 갖춰지기 시작하고 사람들도 좋아해 주니까 제 사회적 위치나 존재감을 확인받으면서 굉장히 힘이 났어요.”

    • '예술도 노동이다' 소개 책자

      '예술도 노동이다' 소개 책자

    • 정은혜 작가가 사용하는 미술도구

      정은혜 작가가 사용하는 미술도구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 작가들은 그림이나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하지만 정은혜 작가는 작품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는 모습과 소통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전했다. “난 사람이 좋아요. 그러니 같이 살아가요.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며 살아가고 싶어요.”
    정은혜 작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어린 시절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는 꽃 그림도 많이 그리고 싶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사람 위주로 그림을 그려왔지만, 저는 꽃도 좋아해서 그림으로도 많이 그리고 싶어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이쁘잖아요, 꽃. 그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지만요.”

    작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은혜 작가

    작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정은혜 작가

  • 너무 힘들지 말아요

  • “포기하지 말고 씩씩한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어요.”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한참을 생각하던 정은혜 작가가 전한 말이다.
    “자기 자신과도, 세상과도 싸우면서 크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강하게 잘 자라서 좋은 동료들과 일도 하고, 스스로 돈도 벌고, 결혼도 해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면 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진심을 전한 정은혜 작가.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림을 통해 자신과 장애에 대한 사회의 인식까지 바꿔버린 그녀 자체가 ‘프로 일잘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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