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리의 의미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의 ‘해리’는 두 가지 의미를 담은 이름이다. 하나는 주인공 주은호의 또 다른 인격인 ‘혜리’의 이름이며 또 하나는 은호가 가진 장애명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다중인격 장애’, 즉 ‘해리성 정체성 장애’인 ‘해리’와 혜리는 동음이의어다. 이 드라마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독특한’ 멜로를 표방하지만 사실 그렇게 독특하진 않다. 다중인격 주인공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들은 사실 그동안 많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킬미 힐미>의 차도현(지성), <하이드 지킬, 나>의 구서진(현빈), 영화 <장화와 홍련>의 수미(임수정) 등이 그렇다. 심지어 <킬미 힐미>의 차도현은 그 안에 7개나 되는 다른 인격(신세기, 안요나, 안요섭, 페리박, 나나, Mr.X)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23아이덴티티>의 주인공 케빈(제임스 맥어보이)은 무려 23개의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극중 인물 간의 갈등과 반전을 다루는 데 용이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킬 수 있는 자극적 소재로 해리성 정체성 장애는 그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혜리의 의미

해리성 정체성 장애, 드라마에나 나오는 이야기일까?

지난 2023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고에 따르면 지난 한 해 해리장애 등으로 1회 이상 진료를 받은 사람은 2,054명으로 보고되었다.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구별된 인격 상태가 존재하는 ‘해리(전환) 장애’ 환자는 단 한 명뿐이었지만, 자신의 과거나 정체성에 대한 기억상실로 가정이나 직장을 벗어나 방황하는 해리성 둔주는 18명으로 나타났다. 그 외에도 해리성 혼미(23명), 기질성 해리장애(58명), 해리성 경련(102명), 해리 기억상실(167명), 해리성 운동장애(197명), 기타 해리(전환)장애(224명), 해리성 무감각 및 감각상실(274명), 혼합형 해리(전환)장애(280명), 상세불명의 해리(전환)장애(710명) 등이 보고되었다. 전문가들은 이보다 더 많은 환자가 존재할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필수 증상이 해리성 장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1회 이상 진료를 받은 이들은 지난해 기준 1만 4,481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건 사고가 빈번하고 사람 간 스트레스도 다양한 이 시대에 해리성 장애는 비단 드라마 주인공들만 겪을 수 있는 희귀하고 특별한 질병이 아닌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싫다. 난 내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내가 싫다. 난 내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연구보고에 따르면 해리성 정체성 장애는 심각한 스트레스나 상처에 기인한다. 은호도 그랬다. PPS 방송국 아나운서 주은호(신혜선)는 8년 동안 열렬히 연애했던 동료 현오(이진욱)에게 헤어짐을 당한다. 결혼을 원했던 은호와 달리 결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던 현오는 은호를 사랑하면서도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때부터 은호는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은호는 몇 해 전 실종된 자신의 여동생인 혜리가 되어 보기로 한다.
처음엔 그저 혜리인 척하는 정도였지만 은호는 점점 혜리가 되어갔고 어느새 혜리라 굳게 믿게 되었다. 겉으론 화려해 보이고 그럴듯한 커리어를 가진 은호는 행복하지 않은데 아무것도 없는 주차요원 혜리는 행복하다. 강주연(강훈)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혜리가 일하는 미디어N서울방송국 근처 주차장에 매일매일 차를 주차하는 강주연 아나운서. 그를 몰래 지켜보며 짝사랑하다가 강주연이 곤란한 상황에서 혜리가 그를 구해준 계기로 둘은 가까워졌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혜리는 그대로 영원히 강주연이라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며 은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결국 은호는 은호로 돌아왔다. 고통스러운 방황을 통해 은호는 현오의 사랑을 확인하고, 굳이 혜리가 되지 않아도 은호 자신으로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은호는 그렇게 혜리를 자신에게서 떠나보낸다.

늘어지는 전개와 미흡한 개연성의 아쉬움

초반에는 해리성 장애가 있는 은호의 이야기를 흡인력 있게 끌고 가는 듯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산만하게 늘어지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가 이어졌다. 역시나 이 드라마에서도 해리성 정체성 장애가 손쉬운 갈등 다루기나 관심 끌기용으로 도구화되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현오가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도 시청자로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현오의 다섯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혈연이 아닌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또 다른 가족의 모습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결혼의 악조건이나 부채감으로만 여긴 현오의 인식이 못내 아쉬웠다. 게다가 여주인공은 왜 그렇게 주체적이지 못하고 사랑에 목을 매었을까. 마치 오빠가 있어야만 울지 않는 홍도처럼.

난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혜리가 사랑했던 강주연의 등장에 현오는 질투한다. 아무리 은호가 혜리라는 다른 인격이 됐더라도 어떻게 자기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것. 그러나 강주연의 사랑은 좀 다르다. 그는 “전 상관없어요, 혜리 씨... 처음부터 전 혜리 씨가 그 누구라서 좋아한 게 아니었거든. 그저 이런 내게 와준 사람이라 내가 혜리 씨를 그래서 좋아했던 거예요”라고 말한다. 한 사람 안에 10개든 20개든 어떤 인격이 들어 있건 그 누구라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와서 모든 처음이 되어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멀리서라도 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사랑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 누구라도 그저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난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오디오북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