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2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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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이

    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 그 XX

    노훈·그 XX(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끼, 끼.워.드.릴.게.요?
MBTI 엔티제(ENTJ)인 영이의 심기에 상당히 거슬리는 워딩이었다.
한쪽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려 보이며 염소처럼 단타로 끊어지는 하.하.하.하 웃음소릴 짜내면서 원만한 사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인 양 나이스한 태도로 “아 저는 이 수업을 취소할 거라서요” 하고 대답하려던 때였다. 눈치 빠른 교수님이 손절각 재는 영이를 알아챘는지, 휠체어 타는 학우님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좀 더 큰 강의실로 변경신청 좀 해야겠네, 하시며 서둘러 나가셨다. 아, 교수님아 그 변경신청을 하지 마오.

수강취소 신청 타이밍을 놓쳐 버린 영이는 급박하게 다른 팀플 멤버를 찾아 매의 눈초리를 굴려 봤지만 그 사이, 레크리에이션 때 종종 애용하는, 숫자 외치는 대로 짝짓기 게임에 익숙한 학우들이 벌써 팀 나누기를 다 끝낸 듯 보였다.
할 수 없이 영이는 끼워드리겠단 그 남자 학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 시그널을 보냈고, 그 놈은 기다렸단 듯이 저 멀리 있는 학우들을 향해 외쳤다.

노훈·그 XX “이 학우님이 ‘장애우’시니까 우리가 이리로 모이자! 편하게 해 드려야지!”

그 놈의 외침에 수강생들이 일제히 영이를 돌아보았다.
편하지가 않았다. 편하게 해 드린다는 그 말이 편하지가 않단 말이다, 이놈아.
기분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솔직한 성격의 영이는 빗금 쳐진 어두운 얼굴로 앉았는데, 놈과 같은 팀을 하기로 한 학우들이 우르르 몰려와 영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각자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문제의 그 놈은 영이보다 두 살 어린 후배로, 군 전역 후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노훈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잘 봐달라는 사족도 잊지 않고 덧붙이면서.
곧장 강의 실기시험에 필요한 연극대본과 자료조사 분담에 대한 회의를 이어갈 거라 생각했던 팀원들과의 대화는, 훈의 리드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놓고 치마 입은 영이의 다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불편하시게 왜 치마를 입었냐는 둥, 언제부터 그렇게 장애인이 된 거냐, 태어날 때부터인지, 교통사고가 난 건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을 이어갔다. 최대한 참고 참느라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득 품은 영이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마디 했다.

고영이 “지금 우리 팀플하는데 제 신상에 대한 설명이 왜 필요한가요, 후배님?”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자 나머지 팀플 멤버들이 어색한 웃음으로 정적을 채웠다.

이후로는 영이의 리드하에 연극대본에 대한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됐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이어진 실기 연습 과정에서 노훈이란 놈은 ‘사람 눈치가 없다고 쳐도, 저 정도로 엉망일 수가 있는 건가’ 싶을 만큼 불쾌를 넘어 희한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영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언행을 일삼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영이가 늘 혼자 앉던 책상에, 같이 팀플을 하면서 친해진 남자선배가 짝꿍이 되어 같이 앉았던 날이 있었는데, 바로 앞자리 책상에 앉아 있던 훈이 킥킥대며 남자선배에게 묻는 말이 “형, 거기 앉으면 안 창피해요?”였고, 연극대본으로 실기시험 칠 때 영이 학우의 발음에 장애가 있어서 알아듣기 힘드니 빔프로젝터로 자막을 띄우자는 아이디어를 내며 어깰 으쓱댔다가, 빈정 상한 영이 눈칠 알아챈 남자선배가 “야 니 발음도 그렇게 썩 좋지 않아, 알고 있냐?” 하고 일갈하니 입을 삐죽대기도 했으며, 같은 팀원이었던 멤버 하나가 노훈이 했던 얘긴데 어이가 없었다며 영이에게 전해 주는 이야기가, “장애학우랑 같은 팀이니까 우린 당연히 가산점은 먹고 들어가겠지? 하하.”라고 하더란다.
‘끼워드릴게요’ 하며 생색내면서 굳이 나를 팀플 멤버로 합류시킨 이유가 결국 이거였구나, 와아 진짜 양아치가 따로 없네, 영이는 생각했다.

누구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강의 팀플 점수는 A+를 받으면서 종강을 맞았다.
그 뒤로도 캠퍼스 곳곳에서 노훈과 마주칠 때가 왕왕 있었지만, 영이는 의례적인 목례만 살짝 해줄 뿐, 노 룩 패스로 쓴 입맛을 다시며 그 후배 놈을 지나쳐 가곤 했었다.
그렇게 대학 졸업 이후론 떠올릴 일 없던 그 놈이, 바로 영이가 방금 전 병원에서 본 그 남자였다.

약국에서 약을 타서 나오던 영이의 전동휠체어가 다시 끼익 멈춰 섰다.
고개를 든 영이 앞에 아까 본 노훈이 서 있었다.

노훈·그 XX “오랜만이네요, 선배. 저 모르시겠어요? 노훈.”

하아, 이걸 아는 척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에 갈등하던 영이는 “쓰읍, 글쎄요, 저는 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연기까지 선보였다. 뭔가 더 설명하려는 훈을 지나쳐 영이의 휠체어는 인도를 내달렸다.
뒤통수에서 계속 지켜보는 훈의 시선이 분명 느껴졌지만 가뿐히 무시해 주며 집으로, 집으로.

안락한 방에 돌아온 영이가 침대에 벌러덩 몸을 누웠다. 진짜 최악의 하루였구나, 떫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때 핸드폰 문자 알림음이 울렸고, 시큰둥하게 문자를 읽던 영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 눈을 비비며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고, 읽어 보고... 몇 주 전에 최종면접을 봤던 광고영상제작사에서 온, 틀림없이 공채 최종합격 안내문자였다.

다음주 월요일, 첫 출근날.
인사팀장 인솔하에 웃음꽃이 만개한 얼굴로 회사 부서마다 인사 다니던 영이는 “앞으로 고영이 씨가 일하게 되실 광고제작팀의 팀장님이십니다!” 하고 소개받은 남자를 향해 찬찬히 고갤 들어 바라보고는, 심장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영이의 전동휠체어 앞에 서서 무쌍의 담백한 눈매를 둥글게 휘어 웃고 서 있는 남자, 노훈이었다.

일러스트. 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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