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5화, 그의 시선이 닿는 곳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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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이

    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 노훈·그 XX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 송해린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

    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 구동혁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

    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 우지선

    우지선 (29세)
    간호사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 변태호

    변태호 (29세)
    카페 사장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오전 9시가 공식적 출근 시간임에도 훈은 늘 8시 30분에 출근했다. 상사가 그렇게 일찍 오면 밑에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겠냐, 스트레스 주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부하직원들의 볼멘소리가 항상 따라다녀도 훈이 이 루틴을 고수하는 이유는, 행여 아파트 엘리베이터 고장이 나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할 상황, 항상 지나가는 차도에 싱크 홀이 생겨 교통이 마비될 일, 회사 지하주차장에서 소매치기를 만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다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 최소 30분 정도는 벌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단 한 번도 훈의 시뮬레이션이 현실화된 적은 없었어도.

오늘도 역시 8시 30분 출근한 훈은 쏟아지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매일 아침 배달되는 생수통을 찾으러 인포데스크 앞에 다가갔다가 왠지 평소와는 확연히 숫자가 적어보이는 생수통 양에 갸웃했다. 마침 안내직원이 화장실에서 핸드크림을 쓱쓱 바르며 나오는 모습에 오늘 생수통이 왜 이렇게 적은지, 내 기분 탓인 건지 묻자, 광고제작팀 신입사원이 같은 층에 있는 부서들 생수통까지 다섯 통을 이미 가져갔다고 대답한다.

노훈·그 XX ‘아니, 한 통에 20kg씩 다섯 통이면 100kg인데, 그걸 광고제작팀 신입사원이 이미 가져갔다고? 아니, 팀장인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신입사원이 또 있다는 건가?’

이해가 전혀 안 되어 훈이 “그러니까, 그... 휠..체어.. 타는 그 여자 신입사원, 그분 말씀이신가요?” 하고 묻자 안내직원은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고, 저만치 멀리 쳐다보며 검지를 들어 “저기, 잘 옮기고 계시네요.” 했다.
따라가 본 훈의 시선에 영이가 지나가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허벅지 위로 생수통을 한 통씩 올려 놔달라고 하더니 전동휠체어를 운전해서 바람 소리 쌩쌩 들릴 만큼 재빠르게 각 부서 정수기 앞에 가져다 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훈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고 잠시 올라오는 법을 잊은 듯했다.

각 부서마다 생수통 옮겨주길 다 마친 영이가 자리로 돌아가 한숨 돌릴 때가 다 돼서야 훈의 정신도 돌아왔다. 괜한 헛기침으로 자기가 왔다는 인기척을 내며 훈이 영이 앞을 지나가는데, 영이가 “안녕하세요! 팀장님!”하고 힘차게 먼저 아침인사를 건넸다. “아, 네! 일찍 오셨네요?” 훈이 대답했다. 굳이 뭐 대답을 바라고 물었던 질문도 아닌, 물음표만 갖다 붙인 평서문이었지만 영이가 그저 씽긋 웃고 노트북 모니터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버리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훈이 자기는 절대 본 적 없어도 안내직원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는 듯이 물었다. “아, 참. 영이씨가 아까 부서마다 생수통을 배급해 드렸다구요. 인포 직원에게 들었어요. 무거운 거 들다가 안전사고 나면 어쩌려고.”
30분 먼저 출근하는 이유와 같은 결로 발동한 훈의 염려에 영이 심기가 또 건들렸다. ‘괜히 다쳐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시키지도 않은 일은 나서서 하지 말라, 이거지? 진짜 고영이 주먹이 운다, 주먹이...’ 치솟는 화에 비하면 너무 앙증맞게 조그마한 크기로 꽉 쥔 영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영이는 참을 인을 머릿속에 박박 그려대며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배급이요? 옛날 어릴 때 우유 급식 먹었던 거 생각나네요. 그때도 저 우유 배급 빠지지 않고 제 당번 차례 되면 제가 했거든요.” 영이가 어릴 때도 하던 일이다, 내가 못할 일이 아니다, 은근히 훈을 멕일 작정에 한 말인데, 정작 훈은 다른데 꽂혔다. 영이의 웃는 모습. 목젖 다 보일만큼 시원하고 맑고 해사하게 웃는 저 얼굴. 대학교 때 처음 봤던 선배 고영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멍하게 자길 쳐다보는 훈에, 영이는 ‘증말. 저 놈은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뭐야?’ 한 번 더 쐐기를 박아야지, 말을 이었다. “하하하. 그리고 저는 무릎에 얹고 가는 거라 하나도 무거운지 모른답니다. 다른 여자들은 빽 고를 때 가벼운 게 제일 중요한 사람도 있는데 저는 무게고 나발이고 예쁘기만 하면 빽이 1키로든 2키로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하하.” 영이가 괜히 손을 나풀나풀 흔들며 너스레까지 떨어보지만 돌아오는 훈의 대답은 “아.. 네.” 한마디였다.
‘저 놈 진짜 킹받게 하네.’ 영이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마그네슘이라도 때려먹어야 되나 싶을 무렵, 동혁과 해린이 출근했고 훈도 자연스럽게 영이를 쳐다보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어제의 영이와 오늘의 영이가 확실히 다른 회사생활이 이어졌다. 밖에 나왔다가 책상에 뭘 놓고 왔다는 동혁의 말에, 영이가 “제가 가서 가지고 올게요!” 잽싸게 가져왔고, 회의하다가 간식이 필요해져 편의점에 갔다 와야겠단 해린의 말에 영이는 “제가 가서 사오겠습니다!” 외친 뒤 10분이 채 걸리지 않고 다녀왔다. 시속 18키로를 자랑하는 전동휠체어 속도는 사람의 걷거나 뛰는 속도에 비할 바가 못 됐다. 광고업체 미팅으로 외근 나갔을 때도 초행길에 길을 잘못 들어 이쪽인가 저쪽인가 갈림길에 서자 영이가 제가 먼저 가서 맞는지 확인하고 맞으면 오시라 연락드리고, 아니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전동휠체어로 쌩하니 달려갔다.

미팅 후 복귀하는 길. 동혁과 해린은 이번에 신입 정말 잘 뽑은 거 같다고 엄지를 척! 들어보였지만 훈은 의도치 않게 궂은일을 다 시키는데 힘들지 않냐 물었다. 영이는 함박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힘들 일이 전혀 없죠. 다리가 아파도 우리 전동이가 아픈 거지. 근데 괜찮습니다. 충전해서 빵빵하게 배불려주면 끝이에요. 하하하.”
훈이 또 영이를 멍하니 응시하며 걸었고, 영이는 ‘저 놈 진짜 뭐지? 이 정도면 뚝배기 크러쉬 하자는 거지? 맞지?’ 빡침을 농도 짙게 녹인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탕비실 커피머신에 캡슐 넣고 라떼를 내려마시던 영이가 들어오는 동혁과 마주쳤다. 동혁도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서 손에 들고 벽에 기대어 영이에게 뭐 힘든 일은 없나 묻는데, 팀장님이 자꾸 내가 웃기만 하면 쏘아봐서 싸우잔 건지 뭔지 킹받는다고 영이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동혁이 쏘아보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눈빛 아니냐 되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뚝배기 크러쉬나 생각하던 영이는 고갤 뒤로 젖혀 이제껏 본 적 없는 폭소를 터트리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동혁은 절대 그럴 리 없는 이유를 대보란다. 영이는 대학 때 훈과의 일화를 들려주며 그게 좋아하는 여잘 대하는 태도냐고. 웃긴 농담한다는 듯 동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퇴근 후, 깔깔대던 영이 얼굴이 사뭇 굳어졌다. 야옹에서 똑같은 얘길 들은 지선과 태호가, 선배 동혁과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던 거다. 태호가 “쓰읍, 그 놈 좀 수상한데?”라며 팔짱을 꼈고, 지선이 “노훈 그 자식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님?” 하고 세모눈을 떴다.

이 싸람들이 진짜 요즘 ‘나는 솔로’다, ‘환승연애’다, ‘하트시그널’이다,아무리 연애프로그램이 화제라곤 하지만 이 정도로 과몰입해서 생판 말도 안 되는 짝짓기까지 시킬 일인가 싶은데.
지선이 “누가 자꾸 내가 쳐다볼 때마다 눈이 딱딱 마주친다? 그건 빼박이야.” 라고 오은영 박사님 급의 단호한 조언을 날렸다.

다음날, 출근한 영이는 오후 3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훈의 저 눈빛. 벌써 13번째 눈맞춤이었다.

일러스트. 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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