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4화, 직장 생활은 처음이라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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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이

    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

    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 노훈·그 XX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

    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 송해린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

    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 구동혁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

    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 우지선

    우지선 (29세)
    간호사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 변태호

    변태호 (29세)
    카페 사장

    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훈의 말에 허를 찔린 영이가 잠시 꺼졌던 정신줄과 다시 접선했다.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하나, 그냥 정면으로 들입다 들이받아? 아니면 딴말로 둘러대서 모르는 척을 계속해?
오들오들한 공기가 온 사무실을 뒤덮은 가운데 또르륵 또르륵 눈알을 굴리던 영이를 구한 건 동혁 선배였다. 우리 노훈 팀장님이 좀 지식이 얕아서 그러니 고영이 씨가 이해해 달라고 헛웃음을 지으며 정적을 애써 깨뜨렸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훈의 한마디. “일하는 사무실에서 첫 출근한 신입이 상사한테 막말하는 하극상은 지식이 엄청 깊어서 그런 건가?”
훈의 말에 또 한 번 영이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는데, 그때 훈이 긴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서더니 영이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노훈·그 XX “저는 그 단어가 고영이 씨에게 예우를 갖추는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잘 몰라서 저지른 결례이니 듣기 거북하셨다면 사과드리겠고, 다시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고영이 씨도 이곳이 공적으로 일하는 회사이니만큼 제 직급에 대한 예의를 갖춰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직장 에티켓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만.”

감정은 완벽히 빼고 차분하게 꼭꼭 눌러 내뱉는 이성적 훈의 말이, 맘 같아선 어떻게든 말꼬투리 붙잡아 늘어지고 싶었지만 아무리 따지고 봐도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잠시 얕은 숨을 고른 영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영이 “저도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는 먹었지만 직장생활은 처음이라서 그래요. 하나하나 배워 가겠습니다.”

서로 잘못을 인정한 훈과 영이는 약속이나 한 듯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곧장 각자의 책상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이게 다 뭔 일인가 싶어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운 해린과 동혁이 눈을 마주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첫 출근을 마친 뒤 초등학교 동창 변태호가 운영하는 동네 카페, 영이의 아지트인 ‘야옹’에 들른 영이가, 푸른 눈에 새하얀 털이 매력적인 고양이 ‘나비’를 연신 쓰다듬었다. 자기 털끝 하나 건들라치면 하악질을 하는 새침쟁이 ‘나비’가 기꺼이 자기 몸을 내어 줄 만큼 영이 기분은 다운돼 있었다. 태호는 카페에서 일하는 중간중간 영이 눈칠 살폈지만 일단은 그냥 좀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대로 혼자 두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까만 밤하늘 별빛이 제법 선명해질 때쯤, 종합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또 한 명의 단짝 우지선이 근무를 마치고 호들갑을 떨며 카페로 뛰어들어 왔다. “그래서, 그래서, 노훈 그 자식이 뭐라던데? 팀장이랍시고 너 막 갈구고 그랬어?”
단톡방에서 이미 대충 이야길 주고받은 지선이 흥분 상태로 물었다. 마침 카페 손님이 뜸해져 태호도 영이가 앉은 테이블로 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지선과 태호가 얼마든 들어 줄 테니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말갛게 쳐다보는 눈빛에, 영이는 하루 종일 혼자인 것만 같아 외로웠던 서러움이 몰려와 후두둑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울먹거리며 중얼댔다.

고영이 “노훈, 그 놈도 그놈인데... 흑..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 흐흑.. 아아.. 완전 욕 나오게 짜증나... 거지같아...”

무슨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고, 무엇 무엇을 할 수 없었다 일일이 늘어놓지 않아도, 초등학교 내내 영이 휠체어를 밀어주고 학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소풍과 수학여행, 각종 야외 체험활동이 있을 때면 항상 이동을 도왔던 태호와, 초중고를 지나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늘 영이 곁에서 화장실 용변에, 식사하기, 씻기, 어깨 아래로 내려간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 도와주는 지선은, 친구 영이가 오늘 하루 어떤 기분, 어떤 마음이었을지 충분히, 아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훌쩍거리는 영이에게 무심한 듯 티슈를 틱 건네주며 태호가 야, 원래 처음이 다 그런 거지,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너 호랑이 아니고 고양이었어? 서슬 퍼렇던 이빨 다 빠졌네. 농담을 했다. 지선도 이에 질세라 우리 귀한 자식 누가 울렸어, 엉?! 내가 가서 아주 들이받아 버릴까 보다, 한 번만 더 그러면 혼꾸멍에 아주 작살을 내 준다 그래! 알았어? 하며 손등으로 영이 뺨에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다 큰 어른이 되었어도 친구들의 이런 시답잖은 말에 힘이 난 영이가 짐짓 겸연쩍어 울먹이는 와중에도, 태호에겐 이빨 빠지면 임플란트 하면 된다고, 지선에겐 들이받기엔 너의 키가 너무 단신이라 경쟁력이 없다며 맞받아쳤고, 까악까악 까마귀가 지나가는 분위기에 세 친구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각, 퇴근길에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서 있는 훈을 발견한 해린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고영이 씨랑 아는 사이신 거 같은데 어떻게 아는 거냐고. 훈은 그냥 대학 선배였다며 말을 아꼈다. 입사하고 2년 동안 몰래 훈에 대한 호감의 마음을 날마다 물을 주며 몽글몽글 키워 가는 중이던 해린은 더욱 두 사람 사이의 서사가 궁금해졌다. 뭔가 더 물어보려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동혁이 다가와 술 한잔 하자며 훈을 뺏어가 버렸다. 궁금증을 해소 못한 채 돌리는 해린의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못내 아쉬웠다.

고교 동창인 동시에 군대 동기인 동혁과 훈은 회사 근처 호프집에서 치맥을 하는 중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크으, 미간을 찌푸리던 훈이 말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에 복귀한 영이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만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선배 해린과 동혁의 자리를 찾아가 시키실 일이 있으면 뭐든지 시켜달라고, 인생 최대치의 사회성을 발휘했다.

“뭐? 팀장님이 지식이 얕아서 그래요? 적어도 지적 능력에 대해선 니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동혁이 피식 웃더니 훈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되물었다. “고영이 씨, 니가 대학 때 종종 얘기했던 그 선배지?” 훈도 싱겁게 픽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근데 왜 그렇게 심기를 건드리는 거냐고, 왜 말년병장 때도 안 하던 상사 갑질을 하는 거냐고 타박하는 동혁에게 훈이 진득진득한 섭섭함이 눅진히 묻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노훈·그 XX “아니, 나는 반가워서 그랬지... 근데 모르는 척 하잖아. 나는 진짜 반갑고, 좋았다고...”

카페 문을 닫고 영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러 지선과 같이 걷던 태호가, 마음이 다소 풀어지고 안정을 찾은 듯한 영이 얼굴에, 툭 던지듯 말했다. “못 하는 거 꽂혀서 질척질척 징징대지 말고 너 잘하는 거 해.” 지선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맞아. 고영이 너라서, 너만이 훨씬 잘할 수 있는 일 많잖아. 까짓 거 아주 본때를 보여줘 버리라고.”
하루 종일 코 빠뜨리고 있던 영이의 눈이 친구들의 말에 순간, 별빛처럼 반짝였다.

일러스트. 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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