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체코, 사회주의를 딛고 일어선

장애인 정책의
진정한 선진국!

글. 이정주 / 경기도장애인복지종합지원센터 누림 센터장

체코의 장애인 정책은 직접적이고 실질적이다. 공동체의 지혜로 근현대의 아픔을 극복한 국가의 노력이 아낌없이 담겨 있는 듯하다.

  • 아름다운 풍경만큼 선진적인 장애인 정책

    • 유럽 여행 중 놓칠 수 없는 나라 체코. 아름다운 일몰과 야경으로 소문난 카를교와 프라하성. 이토록 아름다운 나라지만 체코의 근현대는 슬픈 수난사이다. 16세기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보호령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끝나고는 독일에 저항했던 인사들이 좌우합작 정부를 준비하다 소련의 사주로 공산주의 위성 국가가 되어 버렸다. 쉽게 물러나지 않은 슬라브족 체코는 1968년 짧은 ‘프라하의 봄’을 맞이한다. 그도 잠시 20만 소련군의 침공, 또 다시 공산독재, 이어진 투쟁. 1989년 벨벳혁명으로 1993년 드디어 슬라브족 체코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분리하여 ‘체코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강대국에 접한 나라는 억울한 침략과 합병이라는 지정학적 불운도 겹치지만, 침탈의 시기 생산기반, 자본의 흐름, 선진 기술을 통치 국가로부터 전수(?) 받는 뜻밖의 행운도 얻는다. 체코가 그렇다. 강력한 공업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 시절부터 지금까지 중·동구권 경제와 산업이 밀집된 중심지. 그것이 프라하에서 우리가 만나는 번성한 성채와 고급스러운 교량이 뿜어내는 부유한 풍경의 저변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제조업이 발전한 국가에서 제도적 성과를 높인 장애인 의무고용제(Quota system)을 체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정책도 매우 체계적이다. 체코로서는 달갑지 않겠지만 이웃 나라 독일과 어쩌면 그리 비슷한지, 선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체코의 사회 정책은 우리나라보다 낫고, 특히 장애인 정책은 한 수 위다. OECD 국가의 2015년도 자료를 보아도 장애인 소득보장제도와 고용정책에 있어서 체코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같은 중위권 수준이고 그 바로 위에 독일과 스위스가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는 최하위 칠레 바로 위, 끝에서 두 번째에 랭크되어 있다. 장애인 복지를 포함하여 2019년 OECD가 발표한 국가별 사회복지지출 규모를 보면 더욱 자명하다.

    • OECD 국가별 사회지출(SOCX) 규모, 2019

      (단위: %, 명목 GDP 대비) OECD 평균 20.0 한국 12.2

      출처: OECD Stats(stats.oecd.org, 2021.02.16. 인출)
      주 : 데이터 없는 국가는 분석에서 제외함

  • 실질적인 장애인 정책에 주목하는 체코

  • 체코 장애인 정책을 좀 더 살펴보자. 체코는 인구 1,060만 중 13%, 약 130만 명 정도를 장애인으로 추산한다. 우연히 주목을 끈 용어가 그럴듯했다. 장애인을 말하는 PWD(Persons with Disability)의 D를 ‘Disability’가 아니라 ‘Difficulty’로 썼다. 그러니까 PWD를 ‘Person with Difficullty’, 설명하자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장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차이 또는 차별로 인한 어려움에 주목하겠다는 의미이다. 멋진 수사 같으면서도 과장된 사회주의 선전구와 오버랩되어 피식 웃음도 나온다. 그러나 이내 인구 대비 13%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서비스 양을 보고, 5%의 등록 장애인만으로도 버거워 하는 우리나라가 떠올려져 체코의 진심에 고개를 숙인다.
    그중 하나가 체코 장애인에게 발급되는 장애인 카드(OZP카드)이다. 지역 노동청에 신청하고, 사회보장국 검사관으로부터 판정을 받아 발급되는데 종류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중증장애인은 ‘TP’, 아주 심각한 중증장애인은 ‘ZTP’, 별도로 시각장애인은 ‘ZTP/P카드’를 받는다.

    체코의 장애인 카드 ‘ZTP/P’ 시각장애인용

    체코의 장애인 카드 ‘ZTP/P’ 시각장애인용

    장애인 카드의 혜택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비좁은 체코의 도심에서 장애인 전용공간에 주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차할 때는 ZTP 또는 ZTP/P 카드를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최대 10,000czk(크로나), 한화 약 59만 원까지 부과하는 엄청난 과태료 덕분에 장애인이 아니고서는 주차에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만큼 장애인의 주차장 이용은 어렵지 않다. 복잡하고 좁은 올드시티에서 주차할 수 있다는 건 미국과 같은 대륙의 주차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뜩이나 오래된 도시의 좁은 길을 자차로 출퇴근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에게는 주차장이란 고용의 필수품이다. 체코의 장애인 카드가 빛나는 순간이다.

    • TP
      카드
      대상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이동성 또는 방향성이 중등도로 기능적 장애가 있는 사람
      혜택
      • 대중교통 좌석에 대한 우선권
      • 개인 문제를 처리할 때(예: 사무실)
      • 개인 문제가 예를 들어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거나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아닌 경우 우선순위
      ZTP
      카드
      대상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이동성 또는 방향성에 심각한 기능적 장애가 있는 사람
      혜택
      • 대중교통의 지정석
      • 무료 대중교통 (트램, 무궤도 전차, 버스, 지하철)
      • 사무실에서의 우선순위
      • 국내선 여객열차 및 급행열차 운임 75% 할인
      • 일반 국내 버스 75% 할인
      ZTP/P
      카드
      대상 자폐스펙트럼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가이드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기능 장애 또는 완전한 이동 또는 방향 장애가 있는 사람
      혜택
      • 대중교통의 지정석
      • 무료 대중교통 (트램, 무궤도 전차, 버스, 지하철)
      • 사무실에서의 우선순위
      • 국내선 여객열차 및 급행열차 2등석 운임 75% 할인
      • 일반 국내 버스 75% 할인
      • 일반 국민 여객 대중교통(버스 및 기차)에서 무료 대중교통 가이드
      • 실질적 맹인이 가이드가 없을 경우 안내견 무료 운송

      체코 장애인 카드의 다양한 혜택

    • 체코 장애인 전용공간 주차장

      체코 장애인 전용공간 주차장

  • 장애인 의무고용제를 추동하는 산업과 경제의 힘

    • 길이 좁은 체코에는 유독 자동차가 많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자동차 브랜드, 스코다(skoda)는 유럽 도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Made in Czech(메이드 인 체코)’이다. 유럽 최대의 현대자동차 공장도 체코에 있다. 관련된 기계 산업, 즉 운송장비, 의료장비, 정밀공학 등도 체코의 강점이다. 거기에 구 공산권이라 인건비가 비싸지 않다. 손재주 좋은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제조업 시장이 크고, 일자리도 풍부하다. 유럽 내 가장 낮은 실업률(2.7%)은 당연한 결과이다. 경제 규모도 2023년 1인당 국민소득 3만1,000달러로 우리나라 3만3,000달러와도 큰 차이가 없고, 동유럽에서는 가장 높은 편이다. 체코가 장애인 의무고용제를 강력하게 추동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높은 수준의 산업과 경제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체코 기업이 지켜야 할 의무고용률은 4%이다. 대상 사업체는 상시근로자 25인 이상이어야 하고, 이행 사업체는 연간 1인당 4만8,000크로나(약 283만4,000원) 고용장려금을 받으며 연간 최대 6만 크로나(약 354만2,000원) 정도 세금 감면 혜택도 주어진다. 장애인고용을 위한 직업훈련 또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의 최대 24개월 과정도 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 체코 자동차 브랜드, 스코다 로고

      체코 자동차 브랜드, 스코다 로고

  • 장애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계획

  • 체코의 장애인 카드, 장애인고용, 장애인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장애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지원하는 국가 5개년 계획’ 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체코 공화국이 설립되기 직전 해 1992년부터 매 5년마다 장애인 정책을 수립하고 있으며, 지금은 7차 5개년(2021~2025년) 국가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다. 특히 체코는 2009년 9월 28일 UN장애인권리협약(UNCRPD; UN 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을 비준한 이후 모든 장애인 정책에서 UN장애인권리협약에 근거한 기회와 인권을 크게 다루고 있다.
    얼마 전 2023년 12월 4일 체코 헌법재판소는 자폐성 장애아동의 특수교육을 위해 통합교육을 받을 권리와 정당한 편의제공을 위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있어야 하며, 이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헌법적 가치를 천명했다. UN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이 얼마나 빠르게 체코의 헌법 속에 스며들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체코 프라하 지하철역 표지판

    체코 프라하 지하철역 표지판

    그래서인지 체코에서 만나는 장애인은 당당해 보인다. 체코를 괴롭혔던 이웃 국가 장애인과 비교해도 결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체코는 근현대사의 시대적 아픔을 이겨내고 동구권 최고의 산업국가로 성장했고, 더불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지혜도 얻어 낸 것 같다. 여전히 고색창연한 프라하성, 그 아름다운 야경 속에 장애인을 위한 체코의 노력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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