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6화, 좋아하니까요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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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우지선 (29세)
간호사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변태호 (29세)
카페 사장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에이, 설마.’ 영이가 외면해보려 애썼지만, 학교 때부터 친구 우지선은 연애촉 좋기로 소문난 자칭 타칭 연애달인이었고, 지금껏 10명이 조금 넘는 남자와 사겨본 몸이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데이터 베이스였다. 노훈과 14번째 눈 맞춤이 이루어진 순간, 영이는 저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긴장했다. 그 바람에 행동 불편함은 있어도 펜 한 자루쯤은 자유자재로 놀리던 손가락마저 경직돼 태블릿 펜슬을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촉발한 영이의 당황스러움은 도미노를 일으켜, 책상 위에 놓인 마우스와 테이크아웃 커피 잔까지 엎고 마는데, 이를 목격한 훈이 재빨리 달려와 수습해주며 영이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이것으로 15번째 눈 맞춤이었다.
‘날 좋아해? 왜? 도대체 왜?’ 꼬리에 꼬리만 물어가던 영이의 의문은 생각보다 빨리 꼬리가 잘려버렸다. 회의 시간, 훈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이번 달달커피 건은 드랍합니다. 그렇게 결정했어요.” 영이가 하늘이 무너지는 얼굴로 훈을 쳐다봤다. 해린이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냐 했지만 훈은 단호하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란 듯 외면하고 다른 안건으로 대화를 옮겼다.
달달커피는 요즘 핫한 커피브랜드였다. 최근엔 유명 스포츠 스타를 광고모델로 계약해 광고만 온에어 된다면 엄청난 이슈몰이가 예상됐던 프로젝트다. 그 광고계약 입찰에 영이의 단독 기획안이 통과했고, 며칠 전 미팅까지 마쳤는데 그걸 엎겠다는 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영이는 전동휠체어를 달려 화장실 가는 해린을 쫓았다. 계약 단가가 안 맞는 거면 조금 낮춰서라도 이건 분명 해야 하는 광고다, 수정 요청이 있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 다 뜯어고칠 준비가 돼있다, 해린 선배님이 말씀 좀 잘해주셔라 읍소하는 영이에게, 해린은 어쩐 일인지 이제껏 늘 보여주던 친절한 미소가 싹 가신 채, 리더 결정에 군말 없이 따라주는 것도 회사생활 에티켓이라고, 다정한 듯 싸늘하게 다독였다.
울상이 된 영이가 이번엔 탕비실로 동혁을 찾아가 낙담한 얼굴로 바라보자, 동혁이 누가 보는 눈이 있나 없나 살피며 탕비실 문을 닫아걸고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팔짱끼고 전해주는 이야기가 가히 영이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달달커피와 미팅하고 돌아오던 날, 영이는 그곳에서 바로 퇴근했지만 훈은 팀원들과 다시 좀 사무실로 와달라는 달달커피 관계자들의 연락을 받았더란다. 오고 가는 교통편에 제약이 있는 영이를 다시 부르기가 그래서 팀장 훈과 동혁, 해린만 달달커피 본사를 찾았는데, 그때 관계자의 요청사항이 있었다고. 채택한 기획안 내용은 아주 마음에 드는데 몸 성치 못한 사람을 필두로 거액의 돈이 오가는 비즈니스를 한다는 게 너무 껄끄럽고 불편하며 찜찜하니 고영이씨를 제외하고 이 프로젝트가 진행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단다.
훈은 내부회의를 해보고 연락드리겠단 말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해린, 동혁과 따로 회의를 한 적도 없고, 훈이 판단한 결과, 이 계약 건을 포기하기로 결론 내린 거라는 설명이었다.
동혁의 말을 전해 듣는 동안 영이는 분노에 차서 화르르 불길을 뿜었다가, 발가벗겨진 것처럼 지독한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가, 찬물 샤워한 듯 차갑게 식어 서늘한 오한을 느꼈다가, 몸속 장기들이 저 아래 발끝까지 철렁 내려앉았다가… 감정이 레벨 최정상급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할 말을 찾지 못해 양손 검지 손톱 끝을 톡톡대며 의미 없이 눈알만 굴려대는 영이에게 동혁은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학 때 훈의 일화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혼자 오해하지 말고 직접 물어보라고 조언했다.퇴근 무렵이 되자 훈과의 눈 맞춤은 35번째 적립을 이어갔다. ‘저 놈이 자꾸 쳐다보는 게 날 좋아해서가 아니라 미안해서였구나’ 마른입을 다시던 영이는 사내 메신저로 훈에게 개인메시지를 전송했다.
팀장님! 술 한잔해요.
회사 근처 입구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완비된 어느 양꼬치 집에서 영이와 훈이 마주앉았다.
훈은 술 마시고 전동휠체어를 몰면 음주운전이다, 위험해서 안된다, 콜라 마셔라,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훈의 걱정 섞인 과도한 시뮬레이션을 이제 슬슬 알아가는 영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소맥을 말았다. 조제를 마친 영이가 자작하려고 하자 훈이 술병을 뺏어들고 째려보더니 이번엔 져준다는 듯 영이 술잔에 따라주었다.
훈은 영이의 안전 귀가를 위해 굳건히 술 한모금도 먹지 않고, 영이만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 취기에 자존심도, 체면도 옅어진 영이는 훈에게 드디어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나, 잠깐만 신입 아니고 니 선배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달달커피 계약 건에 대한 얘기인 줄 알았던 훈은, 영이가 동혁에게 이미 전해 들어 아는 줄도 모르고 상황설명을 하려는데, 영이가 시점을 바로 잡았다. “아니, 대학 때, 왜 그랬냐고오~”
동혁 선배 말대로 훈의 사정을 듣는 동안, 씩씩대던 영이는 사뭇 뻘쭘해져 괜히 먹지도 않을 양꼬치 고기를 포크로 한점 한점 빼내는 소일거리를 자청하며 딴청을 피워야 했다.
영이 다리를 쳐다보며 치마 왜 입냐고 했던 건 영이는 몰랐지만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 올라오는 동안 콜록대고 기침하는 영이 모습에 감기 걸릴까봐 체온 하강을 걱정했던 거였고, 영이와 같이 앉은 선배에게 창피하지 않냐 물으며 킥킥댔던 건 영이 옆에 앉아서가 아니라, 그 선배가 지난 학기 그 강의에서 F학점을 받아서 재수강하는 입장인데 맨 앞자리에 앉으면 교수님께 창피하지 않냐는 말이었고, 발표 때 자막을 띄우자 했던 건 영이 발음에 대한 비하나 조롱이 아니라 그때 영이와 친하게 지내던 학우들이 말하길, 영이가 카톡에선 말이 많은데 오프라인에선 말수 적은 게 아마도 말하기에 다소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기에, 영이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고 싶은 뜻이었고, 장애 학우니까 가산점 받겠지, 라고 했던 발언은 ‘장애 학우’라서가 아니라 영이 선배가 매 시험 수석하는 최우수 장학생이니 그 ‘장학생’ 선배 고영이가 이끄는 발표는 당연히 점수가 잘 나오겠다, 우리가 묻어가는 거다, 라는 의미였는데 워딩이 잘못 전달된 것이었다고.하나하나 따지는 영이 말에 적당히 임기응변 지어내는 말이 아니라, 의혹 제기할 때마다 술 한 잔 마시지 않았지만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억울함을 토로하는 훈의 모습에, 영이는 그의 진심이 온 심장 촉촉하도록 전해졌다. 모든 의혹이 풀리자 영이는 혼자 오해했던 시간들이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덕분에 할 말이 궁해져
“아, 그니까 감기든, 콤플렉스든, 장학생이든 세상만사 왜 쓰잘데기 없이 누가 나한테 관심을 가져달래?”
괜스레 툴툴대며 영이가 톡 쏘는데, 여전히 억울한 감정선을 유지 중이던 훈이, 따로 생각하고 적당한 말을 고를 틈도 없이, 억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어투로, 영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냉큼 대답이 튀어나와버렸다.
“아, 좋아하니까요!”
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