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인플루언서
선형상사 백호정 대표
세상 하나뿐인
신발 한 켤레에 담긴 온기
글. 이수정
사진. 박재우
신산했던 젊은 날을 지나 그의 삶에도 평화가 깃든 걸까. 장애인 특수화를 제작하는 선형상사의 백호정 대표는 편안한 표정으로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37년 세월의 이야기를 잔잔히 들려주었다. 부산 바다가 유난히도 푸르던 날, 그는 어른이 되어서야 생긴 자신의 꿈을 소개했다.
Q. <장애인과 일터> 독자들을 위해 선형상사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선형상사는 베풀 선(宣) 자에 형태 형(形) 자를 써서 ‘선한 형태’를 베푼다는 뜻을 담은 기업입니다. 신발을 만드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신발골을 자체 생산하고 2002년부터는 도레미라는 장애인 특수화 제작 브랜드를 만들어 특수화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현재 12명의 직원과 함께 부산 남구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
Q. 처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구두 기능공이셨던 아버지 곁에서 신발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소아마비로 우측 발이 까치발인 장애를 갖고 있었고요. 20대 후반에 도피하듯 호주로 떠났죠. 2년 동안 혼자 세차하고 청소하면서 번 돈으로 공부하던 서른 살 무렵이었어요. 당시 서울에서 신발제조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부산에서의 사업까지 맡으셨지만, 점차 사업이 영세해지더니 그즈음엔 도산 직전인 상황이었어요. 아버지께 연락이 왔어요. 부산에 와서 도와달라고요. 부산에 오고 나서 하루는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아버지가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모습을 본 거예요.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해요. 그런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 부산에 정착해 1988년 1월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Q. 젊은 나이에 부도난 기업을 일으킨다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한때는 인생의 끝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공장이 있던 곳은 길이 좁고 건물이 다닥 붙어있을 만큼 열악했는데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1년 4개월간 먹고 자며 생활했어요. 당시엔 돈이 너무 없어서 하루에 딱 천 원짜리 한 장 주머니에 넣고 살았어요. 서러운 만큼 마음에 독기를 품고 일어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서울에서 살다 왔으니 부산 지리를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 구두 만드는 방법을 배워나갔어요.
Q. 어떻게 그 힘든 시절을 넘기셨나요?
딱 두 사람을 만나면서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화승그룹, 지금 르까프의 부산지부를 무작정 찾아갔는데 그때 만났던 부장이 제 얘길 듣더니 ‘그래, 내가 힘닿는데까지 도와주겠다, 1등 한번 해봐라’라고 하며 그때부터 르까프에 나가는 모든 신발골을 선형상사가 맡게 됐어요. 또 한 명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리복 회사의 직원이에요. 얘기를 나누다 그 직원이 우리 회사에 찾아오게 되고 우리 업체를 리복의 신발골 공급 업체로 등록해줬죠. 그 뒤 선형상사가 인도네시아에 한국 최초로 신발골을 수출하게 됐고요. 당시 공장에 직원이 4명 남아있었는데 함께 신발을 만들면서 빚도 갚고 종자돈도만들면서 사업도 점차 풀려갔어요.
Q. 신발골 제작을 수년 동안 이어 오다가 어떻게 장애인 맞춤 신발 브랜드 ‘도레미’를 시작하셨나요?
평생 응어리처럼 아버지의 아픈 발이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서대문구 영천동 산꼭대기에 살면서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구르거나 넘어지셔서 다치기 일쑤였거든요. 그 모습에 한이 맺혔나 봐요. 제가 장애인 특수화 제작을 하겠다고 하니 정작 아버지는 반대하시더라고요. 돈 안 되는 일을 왜 하냐면서 말이죠. 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일본에 ABC마트라는 신발 판매 기업처럼 한국의 도레미를 만들고 싶었어요. 도레미 음계가 점점 높아지는 소리를 내잖아요. 신발을 통해 장애인들의 삶도 점점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름에 담았어요.
Q. 당시에 특수화를 만드는 기술은 어떻게 개발하셨나요?
장애인 신발은 발에 맞는 신발골을 만드는 것부터가 난관이에요. 발 모양이 특수해 일반인들 신발처럼 일률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수천만 원짜리 독일, 일본, 이탈리아 신발골 만드는 기계를 가져와 분해하면서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을 3D로 스캔해 레이저로 형틀을 깎아내는 시스템을 개발했어요. 세계 최초로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상용 공정기술이었죠. 이 시스템을 통해 신발 골격을 만들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계가 신발골을 깎아요. 그리곤 신발골에 맞춰 개인별 패턴을 만들면 40년 이상 경험의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신발을 재봉하죠. 보통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15일 정도가 걸려요. 하루에 많아야 2켤레 정도를 생산하고요.
-
Q.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특수화 사업을 지속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회사 식구들을 생각하면 쉽게 그만둘 수 없는 게 가장 크죠. 회사 문을 닫으면 여기서 일하는 구두 기능공들이 어딜 가겠어요. 게다가 우린 장애인 신발을 만드는 거잖아요. 우리가 아니면 좋은 신발,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을 수 없어요. 장애인들이 우리 신발을 신는 모습을 저는 계속 보고 싶어요.
Q. 지난해엔 정전 70주년을 기념해 한국전쟁 참전용사 중에 발에 장애가 생긴 분들에게 신발을 제작해주는 일에 참여했다고요.
전국 16개 도시를 돌면서 참전용사들을 직접 만나고 발 치수를 직접 쟀죠. 해외에서도 한국으로 와서 신발을 맞춰갔어요. 총 22개국, 280여 명의 신발을 만들었는데 그때 신발을 맞춘 용사들에게서 감사의 편지가 지금도 와요.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으니 사람과 일에 저절로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Q.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업을 이어오면서 대표님의 삶에 신조가 되는 말이 있을까요?
요즘은 ‘배우기를 멈추는 것은 죽음과도 같다’라는 말을 하루에 꼭 한 번 메모지에 글로 새겨요. 자만하지 말라는 뜻에서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도 있지만, 누굴 만나든, 어디를 가든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요. 배움만큼 삶을 건강하게 살아내게 하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인지 삶에 감사함을 많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젠 비좁은 공장에서 숙식하며 살던 힘겨웠던 시절도 제 삶의 자부심이 됐어요.
-
Q. 장애인을 위한 구두 기술학교를 만드시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선 것 같아요.
느지막이 꿈이 생긴 거죠. 평생을 바쳐 키워낸 특수화 제작 기술을 교육을 이제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전수해주고 싶어요. 지자체, 비영리 종교단체들과 협업해 무상으로 교육을 지원할 계획이에요. 평소 신발을 만들면서 장애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종종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기 한계를 쉽게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곤 해요. 하지만 살아보니까 사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라고요. 장애인들에게 교육을 통해 경제활동이나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배움을 통해 장애인들도 성취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Q. 끝으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해주세요.
장애인이던 아버지를 보며 장애인을 향한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큰지 오래도록 봐왔어요. 장애인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적 모습을 볼 때면 지금도 화가 날 때도 많고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장애인들이 재능을 특화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멘토링하는 제도를 만들어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