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일잘러

시각장애인 천재 피아니스트 유예은

촛불처럼 세상을 밝히는
음악인이 되고 싶어요

글. 김엘진  
사진. 김도형

  • 선천적으로 안구가 없이 태어난 시각장애인이지만 한 번 들은 음악을 바로 피아노로 연주할 만큼 놀라운 청각 능력과 음감을 타고난 시각장애인 천재 피아니스트 유예은 씨를 만났다. 듣는 재능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예은 씨는 또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달려가라”고 전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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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뛰어난 음감과 기억력으로

  • 유예은 씨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2007년 3월 3일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라는 방송을 통해서다. 앞이 보이지 않는 5살 조그만 소녀가 아장아장 걸어 나와 자기키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건반을 치던 모습은 시청자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게 됐다. 한 번도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었다는 작은 손이 건반 위를 누비며 ‘엘리제를 위하여’와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연주했다.
    “처음 재능을 발견한 건 교회에서였어요. 엄마가 당시 성가대 연습을 하고 계셨는데 그때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신기했나봐요. 쉬는 시간에 반주자가 치던 음을 그대로 따라서 쳤다고 해요. 그래서 엄마도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고.” 그때가 세 살이었다. 건반도 보이지 않고, 악보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한 번 들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예은 씨는 머릿속에 악보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실제로 음표를 본 적은 없지만, 상상할 수는 있어요.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의 기호들이 떠올라요. 지금은 점자 악보들도 접하고 있지만 여전히 저는 듣고 기억해서 연주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져요.”

    • 피아니스트 유예은

      피아니스트 유예은

    •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고 박수를 쳐줬는데 사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곧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응원해주시는구나 싶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머릿속에 음표가 떠다녀요”

  • 스타킹에 나왔던 작은 아이는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피아노>(2015)를 통해 또 한 번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2022년 음악학과 피아노 전공으로 한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사이에도 예은 씨는 꾸준히 피아노를 연주했고, 많은 곳에서 재능을 뽐냈다. 초등학생 때 UN 본부에서 연주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고 박수를 쳐줬는데 사실 처음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곧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응원해주시는구나 싶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는 두 번의 오케스트라 협연도 경험했다. 2023년에는 밀알복지재단 30주년 기념 ‘제20회 밀알콘서트’에서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주했으며, 지난 3월에는 ‘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두 번째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주했다. 첫 오케스트라 협연이라 긴장도 됐지만, 공연이 끝난 후에는 뿌듯함과 행복감이 남았다.
    “이러한 경험을 하면서 비록 보는 능력은 없지만, 듣는 능력이 월등하다는 점에 감사하게 됐어요. 협주는 정말 설랬고, 특별했고,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곡을 연주할 때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할까? 그는 곡에 따라 다르다고 대답했다. 어떤 곡은 그냥 선율을 따라가고, 어떤 곡에는 자신의 경험을 담게 되고, 또 어떤 곡은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고. 그는 제일 좋아하는 연주곡으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꼽았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에게 라 캄파넬라는 항상 화려하고 예쁘고 커다란 조각케이크예요. 부드러운 생크림과 초콜릿, 과일 조각을 사용해서 정말 예쁘고 화려한 케이크를 만드는 거죠.”

    • 지난 3월 27일 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주한 예은 씨

      지난 3월 27일 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주한 예은 씨

    • 예은 씨의 자작곡은 진실로 아름다웠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이 음악으로 그려낸 비가 내리는 풍경은, 우리가 시각 외 얼마나 많은 감각을 잊고 살았는지를, 시각에만 의지해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 가장 큰 지지자, 가족

  • 3살에 피아노를 접하고, 22살이 된 지금까지 예은 씨는 음악과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피아노는 언제나 예은 씨의 꿈이고, 행복감을 주었지만 때로는 커다란 벽에 부딪힌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그렇다.
    “클래식을 연주할 때 의외로 어려운 부분이 자연을 표현하는 부분이었어요. 예를 들어 밤하늘의 별이나 구름, 아름다운 계곡 등을 상상하고 싶은데 제 기억 속에는 별이나 구름, 계곡이 존재하지 않거든요.”
    그럴 때는 엄마찬스를 썼다. 엄마는 항상 예은 씨의 곁에서 모든 것들을 설명해주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시력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뻔한 어떤 것들이 예은 씨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엄마는 예은 씨가 표현이 어려워 끙끙댈 때에도 손을 내밀어준다.

    • 자작곡 '비들의 행진'을 연주하고 있는 예은 씨

      자작곡 <비들의 행진>을 연주하고 있는 예은 씨

    • 한세대 음악관 앞에서 점자정보단말기를 들고 있는 예은 씨

      한세대 음악관 앞에서 점자정보단말기를 들고 있는 예은 씨

    “한 번은 엄마가 그런 이야길 했어요. 매운맛에도 캡사이신이 들어가 뾰족하게 쏘는 매운맛이 있고, 달달한 매운맛이 있고, 뭉근하게 매운맛이 있지 않냐고. 내가 표현하는 매운맛에 달달함이 들어있는지, 뾰족한 맛이 들어있는지 다르게 표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런 식으로 제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제가 경험한 것을 예로 들어 표현해주시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돼요.”
    실제로 엄마는 예은 씨의 삶에 빛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처음 <스타킹>에 나왔을 때부터 밝힌 부분이지만, 예은 씨의 부모님은 친부모님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감사한 존재다.
    “지금의 삶, 내 존재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가족이에요. 아빠는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우리 집에는 함께 하는 지적 장애인들이 있고 모두 제 식구들이죠. 엄마는 항상 어려운 곳에 손을 내미는 분이었고, 그로 인해 저는 더 많은 경험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어요.”

  • “꿈을 향해 달리는 모든 분을 응원해요”

  • 피아노 연습이 힘들고 지칠 때면 자연스럽게 작곡을 하곤 한다. 현재 완성된 곡은 세 곡인데, CCM 한 곡과 아직 장르를 설정하지 못한 두 곡이 있다고. 어떤 순간의 감정이나 경험, 기억 등을 살려 그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는 피아노곡으로 바꾸는 것이 그의 작곡법이다. “문제는 제가 악보를 그리는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충동적인 작곡을 하게 되니까 녹음할 기회를 자주 놓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지금 세 곡만 녹음본으로 가지고 있어요. 언젠가는 제 곡들을 모아 음반을 내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잠깐 연주를 부탁해 듣게 된 예은 씨의 자작곡은 진실로 아름다웠다. 비가 내리는 풍경을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이 음악으로 그려낸 비가 내리는 풍경은, 우리가 시각 외 얼마나 많은 감각을 잊고 살았는지를, 시각에만 의지해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예은 씨의 장래희망은 뭘까? 그는 꿈을 묻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두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꿈을 가지고 있는, 꿈을 위해 달려가는 모든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는 장애인들이 꿈을 가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꿈을 가진 장애인들을 보며 주변에서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일도 의외로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꼭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저는 촛불처럼 세상을 빛내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요. 그걸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소통하지 않으면 혼자만의 세상에 갇힐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우고, 다른 환경을 배우면서 음악을 만들어 나가면 언젠가는 공감할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음악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대학 생활도 한 해가 남았다. 예은 씨는 졸업 후 대학원을 생각해야 할지, 유학을 갈 수는 있을지 고민이 된다. 생활비며 학비도 걱정스럽다고. 재능이 있는 장애인을 위한 지원책 마련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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