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랑은 기적이다!
영화 ‘청설’(2024)-
- 글.
- 차미경 문화칼럼니스트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준 영화
대만 영화 ‘청설’(2009)은 내게 ‘사랑스러움’으로 기억되는 영화다. 대만의 첫사랑 대표 배우 3대 천왕 중 하나라는 ‘펑위엔’ 때문도 아니고 상큼발랄한 여자 주인공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주인공 티엔커(펑위엔 역)의 부모가 아들의 농인 여자친구를 환영하는 첫 만남 장면 때문이었다. 만약 국내 드라마였다면 ‘감히 내 아들을 너 따위가?’ 이런 폭언은 기본에 소위 물싸대기, 김치싸대기가 난무하는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티엔커의 부모는 달랐다. 수어를 할 수 없는 자신들을 아쉬워하며 아들의 농인 여자친구를 위해 하고 싶은 말들을 스케치북에 적어(영화 ‘러브 액츄얼리’처럼)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진심 어린 환영의 말을 건넨다. 이 장면에서 퉁퉁하고 소박한 중년 부부의 다정한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힘들고 부정적인 상황들로 장애를 부각하지 않고 장애를 그저 다른 특성으로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그려낸 이 장면을 나는 이 영화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그런 대만 영화 ‘청설’ 이 지난 2024년 리메이크되어 우리의 영화로 다시 개봉되었다. 내가 사랑한 그 장면은 과연 어떻게 그려졌을까.
리메이크,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더했나
다행히 내가 사랑스러워하던 그 장면은 리메이크작에서도 놓치지 않았다. 아들(용준)의 농인 여자친구(여름)와의 첫 만남을 환영하는 용준 부모의 스케치북 대화 역시 원작만큼 사랑스럽고 따뜻했다. 다만 원작에서 웃음을 머금게 했던 과일 접시가 리메이크작엔 등장하지 않아서 좀 아쉬웠지만. 식탁에 내놓은 접시 위에 귀엽게 깎아 놓은 앙증맞은 과일들이 양양을 향한 티엔커 부모의 순수한 환대를 잘 표현한 아주 인상 깊은 포인트였는데 말이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여주인공 양양은 농인 수영선수 샤오핑을 언니로 둔 동생이었는데 리메이크작에서의 여름은 가을이의 언니라는 것이다. 왜 동생이었던 여주인공을 리메이크작에선 언니로 바꾸었을까? 아마 소위 K-장녀인 여름의 힘겨운 고군분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여름은 농인 부모와 세상을 연결하느라 어릴 때부터 애써왔고 역시 농인인 동생 가을이의 수영선수로서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한다. 용준은 그런 여름이 안쓰러워 그녀 곁에 있어 주고 싶어한다. 원작의 양양도 리메이크작의 여름이도 모두 장애가 있는 자매에 대해 지나친 책임감을 가지고 과잉보호한다. 그러나 원작의 샤오핑도 리메이크작의 가을이도 보호받아야 하고 의존적인 전형적인 장애인 캐릭터가 결코 아니다. 둘 다 자매의 과도한 집착과 과보호를 거부하고 스스로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주저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단단한 인물이다. 리메이크작에는 원작에 없던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바로 여름이와 가을이의 농인 부모와 용준의 친구 재진이다. 재진은 마지막 엔딩에 숨겨 놓은 사탕 같은 쿠키 영상에 등장해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하고, 여름이와 가을이의 농인 엄마는 여름이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돌보기만 하는 것은 동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 ‘너의 인생을 살라’고 북돋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농인은 못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
‘청설(聽說)’은 듣고 말한다는 뜻이다. 소통과 공감은 청력과 언어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단순한 대화를 넘어 진정한 이야기를 하자는 의미의 제목일 테다. 용준의 아버지(현봉식 역)가 이렇게 말한다. “멀쩡한 사람도 말 안 통하는데, 사람만 좋으면 되지 뭐.” 서로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먼 우주의 외계인과 나누는 대화처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한 대화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귀와 입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것. 용준과 티엔커는 그 사실을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힘겨운 분투를 응원하고 싶었고, 곁에 있고 싶었고, 나눠 갖고 싶었다. 용준과 티엔커는 여자친구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보고 듣는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시각장애인은 다른 방법으로 보는 사람이고 지체장애인은 다른 방법으로 걷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장애를 무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 다른 평범함으로 바라보는 시선,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사랑과 꿈은 기적이다. 듣지 못해도, 말하지 못해도, 번역 없이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메이크작엔 없지만 원작은 이런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의 한 줄 요약쯤 될 것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기적이 아니라,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세상 모든 사랑은 기적이다. 왜냐하면 태생이 이기적인 존재인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 서로의 영혼이 닿아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며 가장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순간을 함께 사는 것. 그것을 이름하여 ‘사랑’이라 부를 텐데 그런 순간이야말로 기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기적은 한낱 장애에 갇히지 않는다.
옥에 티
그러나 리메이크작엔 원작에 없는 결정적인 옥에 티가 있다. 가을이 소속된 농인 수영선수단이 늘 훈련하던 수영장에서 다른 어린 이용자들의 엄마들이 ‘장애인과 한 수영장을 쓸 수 없다’며 집단 항의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가을이와 여름 자매가 장애 때문에 일상에서 겪는 힘겨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너무 과하게 작위적이고 개연성도 부족했다. 게다가 이어진 다음 장면은 또 어떤가. 항의한 대표 아줌마를 쫓아간 용준의 장애인 주차장 훈계 장면. 그야말로 너무나 계몽적인 장면이었다. 이에 비해 원작은 이런 갈등을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그렸는데 원작보다 진일보한 장면이 아니라면 굳이 넣지 않았어도 좋을 옥에 티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실에선 그보다 더 심한 차별적인 상황이 많이 있는데? 물론 그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장면을 여과 없이 다 그려 넣어야 할까?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리얼리즘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이 싱그럽고 몽글몽글한 청춘 영화에서라면 굳이 그런 장면은 피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미 용준과 그 부모 등이 긍정적이고 우회적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굳이 그런 부정적인 장면은 불필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보다 과장되고 작위적인 방법으로 부정적으로 그려낸 장애 이미지는 사람들 뇌리에 더 오래 각인되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에 티를 거르고 거르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결점 없는 순백의 걸작이 탄생하리라 믿고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