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두 개의 휠체어와 한 개의 캐리어, 두 개의 배낭을 가지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 비행기에 올라타면 4개월간 미국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오래 타지에 나가 살아본 경험도, 휠체어를 두 대나 비행기에 실어본 적도 없었지만, 여러 사람의 손에 이끌려 움직이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대학 기숙사에 도착해 있었다.
미국 시골 캠퍼스에서 깨달은 창작자의 정체성
나, 잘하는구나?-
- 글.
- 김지우 작가(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을 운영하는 유튜버)
집에서 18시간 떨어진 곳에서 받은 질문
내가 공부하게 된 곳은 인디애나 먼시, 비행기만 16시간, 공항에서 학교까지 또 2시간이 걸리는 미국 시골이다. 덕분에 쓰고 찍고 만들 시간이 많았다. 작가로서, 그리고 콘텐츠 제작자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영어로 스크립트를 쓰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영상을 편집했다.
할 게 많이 없는 곳이었기에 학교생활에도 집중할 수 있었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다큐멘터리 수업을 듣는 일이었다. 전문적으로 영상을 배워보지 않은 입장으로서 화면 구성의 배치, 스토리텔링의 기술, 인터뷰 현장에서의 스킬 등을 배울 수 있는 건 아주 행운이었다. 수업은 전반적으로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부족한 영어 실력이지만 매 수업시간 서툴게나마 답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다큐멘터리 수업은 수강 신청 이후 뒤늦게 알게 되어 듣지 못할 뻔했다. 여태껏 해온 영상들과 내 포부를 담아 긴 메일을 보냈고, 부학과장까지 승인 절차를 거쳐 겨우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어렵게 수업을 듣게 된 만큼 이 수업에 날 들인 것이 좋은 선택이었음을 뽐내고 싶었다. 영어로 제작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고 바로 교수님께 보냈다. 그리고 도착한 메일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메일을 읽었을 때…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비단 그것은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좋은 피드백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언가 달랐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무엇으로 어떻게 편집하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많이 없었다는 것을. 영상의 어떤 부분을 잘라내고 이어 붙인 것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드물었다는 것을.
‘장애인’이자 창작자인 나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며 늘 공허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인터뷰로 초대된 스튜디오에서 창작물 내부의 요소보다 내 삶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하고 오게 되는 날 그런 마음이 크게 들었다. 나는 그런 질문들을 받는다. “장애인 창작자로서
어떤 메시지를 사회에 주고 싶으신가요?”, “몸이 힘들지는 않나요?” 그러면 나는 왕창 장애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만다.
실은 그것보다 내 영상의 스타일은 무엇인지, 글을 쓸 때 집중하는 부분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나만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질문하는 이로부터 어떤 문장이 아름다웠는지, 어떤 장면이 마음을 움직였는지 듣고 싶었다. 부족했다면 부족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장애가 있는 창작자에게 사람들은 종종 그가 만들어낸 것보다 그것을 ‘왜’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성장하며 느낀
결핍, 장벽을 마주하며 느낀 분노, 그것을 예술로 승화해 간 과정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 결국 그의 ‘장애’만이 중요해진다. 장애는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을
개선해야 하는지도 이야기하기 어렵다. 결국은 ‘따뜻한’이나 ‘선한’이라는 ‘높은 가치(하지만 동시에 논쟁의 가능성이 없는)’를 담은 수식어로 ‘칭찬’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말하기는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무지한’ 비장애인을 ‘반성’하게 만드는 도구로서만 작동한다.
갑자기 도착한 교수님의 메일에서 읽으며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잘하는구나?’
장애인이자 ‘창작자’인 나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만들어냈다는 칭찬이 없어도 내 영상이 가치 있을 수 있었다. 흥분되는 마음이 들었다.
더 잘하고 싶었다. 다양하게 시도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계속 쓰고 찍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로 창작물을 만들다 보니 작품의 초점이 달라지는 경험도 했다.
장애를 말하지 않고도 영상을 기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학교의 캠퍼스에서 휠체어를 탔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캠퍼스에
서 만난 학생들은 휠체어가 어색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를 짚거나, 휠체어를 타는 학생들이 복도를 오갔다. 다양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나를 ‘휠체어를 탄 장애 학생’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매일 캠퍼스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를 보고 한 친구는 ‘유튜버냐’라고 물으며 사진사인 자신과 협업하자고 했다. 휠체어가 돋보이게 사진을 찍을 줄 알았는데, 하얀 옷을 입히고 빔프로젝터를 가지고 오더니 내 상반신에 초점을 맞췄다. 표정과 다양한 포즈를 요청했다. 그냥 일반 모델처럼.
캠퍼스의 국제 학생을 취재하고 있다며 인터뷰를 요청한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휠체어를 탄 학생으로서 할법한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이렇게 물어왔다.
“미국에서 겪었던 가장 큰 문화충격은 뭐야?”, “수업 분위기에서 한국과 미국의 차이점은 뭐니?”,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은 너에게 어떤 의미니?” 나는 준비해 간 말을 모두 잊고 한 명의 학생으로서 신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나를 소개하는 말들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학교에 몇 없는 아시아인으로서, 가족을 두고 먼 타지로 떠나온 여행자로서, 졸업을 앞둔 대학생으로서, 장거리 연애 중인 20대로서 말하고 쓰고 찍었다.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아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