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비치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그녀의 이런 증오는 장애가 있는 나에게조차도 신선했다. 그녀 말대로 종이책을 넘기는 일은 적어도 다섯 가지의 신체 능력을 요구한다. 그녀의 신체 능력으로는 종이책을 들고, 넘기는 일마저도 큰 고통이 되니 종이책은 그녀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 온갖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해가며 종이책을 사랑한다고 무심히 말하는 사람도 그녀에겐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증오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증오’가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말처럼 ‘운동 능력이 없는 내 몸이 아무리 소외를 당하더라도 공원 철봉이나 정글짐에 증오감을 품지는 않는’ 것과 같다.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 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앙탈을 부리듯 ‘미워 죽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연극 속 그녀의 마지막 상상 속에 나온다. 그 ‘미워 죽겠는’ 증오에는 애정과 갈구, 닿고 싶은 갈망이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종이책을 증오하면서도 종이책에 달라붙어 끝까지 읽는’ 그녀의 진심이다.
‘임신과 중절, 그리고 고급 창부’를 꿈꾸는 그녀의 욕망 역시 그런 맥락이 아닐까. 가령 장애인이 ‘나도 걷다가 다리가 부러져 봤으면’이라든가 ‘붐비는 버스 타고 출퇴근하느라 과로사 해봤으면’하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 말이다. 장애가 있는 여성은 무성의 존재로 치부되어 버리는 세상에서 ‘임신이나 고급 창부’에 대한 열망은 성적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열망과 갈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996년까지 일본에는 「우생보호법」이 존재했다. 우생학을 기반으로 한 「우생보호법」은 우월한 생명체 보호를 목적으로 장애인의 생명을 부정하고 여성의 생식 권리를 국가가 통제하려 한 악법이었다. 샤카의 ‘중절’에 대한 열망은 바로 그것을 꼬집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조차 불가능한 삶에서도 그녀는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위악적으로 세상을 비꼬면서 장애만으로 규정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녀 말대로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 파괴되어 가는’ 존재로서 기꺼이 주어진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의 치열한 인간 선언이기도 하다. “ <헌치백>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상호교차성으로, 강자와 약자의 구도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고 원작자인 이치가와 사오는 작품에 대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간병인 다나카와 1억 5500만 엔(155cm 그의 키 만큼의 금액)에 성을 거래한 샤카. 가난한 간병인과 그의 성을 돈으로 사는 부자 장애인 샤카의 갈등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어 했던 상호교차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신랄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면 연극이 더 긴장감 있고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