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AD 웹소설
『고양이 눈 키스』
11화(完), 나랑 같이 걸어요!
글. 김뜰
뇌병변장애를 가진 작가로 영화, 웹소설, 웹드라마, TV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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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이 (23세~29세)
뇌병변장애, 대학생~광고영상업체 신입사원휠체어 사용 장애인.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굳은 몸동작이 드러나고 말하는 것 역시 약간 어눌하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팩트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일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적고 인간관계도 좁아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다.
노훈·그 XX (21세~27세)
대학생~광고영상업체 팀장태어나서 장애인을 본 게 고영이가 처음이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잘 모르고 서툴러서 실례를 저지르는 스타일.
머리도 좋고 일머리가 있어서 이른 나이에 일찍 승진했다. 약 서너 번 해 본 연애가 전부이고 외동아들이라 여자를 잘 모른다.
구동혁 (27세)
광고영상업체 편집 PD노훈과 고교 동창, 군대 동기 사이다. 눈치가 매우 빠른 편이고, 분위기 파악에 능하다.
서로 비난과 험담이 주 대화지만, 노훈의 대나무숲이 되어 주는 존재다.
변태호 (27세)
카페사장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고영이 휠체어 전담 드라이버였다. 영이를 좋아하는 맘도 있는데 친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감추고 있는 상태.
영이와 티키타카가 좋다.
송해린 (25세)
광고영상업체 디자이너입사 2년차. 사수였던 노훈을 좋아하는 중이고, 노훈도 이를 알고 있다.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편이다.
우지선 (29세)
간호사고영이와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고영이의 화장실, 식사, 목욕 등등 브래지어 끈까지 올려 줄 정도로 도와줘 보지 않은 게 없다.
영이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친구. 영이를 좋아하는 태호를 좋아한다.
팀원들의 뜨거운 시선 폭격 속에 팀장 훈이 사무실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2분이 채 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훈은 네, 아, 네네, 아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 단 여섯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마쳤다.
영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훈의 말을 기다렸지만, 훈은 큰 표정 변화 없이 이번 주까지 마무리해야 할 홍보영상 가편집본의 진행 상황을 물을뿐이었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 일정표와 수정 콘티 시안을 확인하여 훈에게 보고하는 동혁과 해린의 모습에, 영이도 굳이 묻지 않았다. 달달커피 광고 계약 건은 그렇게 떠나갔다.훈은 달달커피 팀장에게서 자신의 윗분들이 워낙 나이대가 있으시고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분위기라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해 미안하게 됐다고, 대신 조만간 좋은 연락이 갈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저 위로차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팀원들에겐 말을 아꼈는데, 정말로 몇 주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금융 핀테크 스타트업 대표로부터 직접 연락이 와서 지면 광고는 물론 온라인용 바이럴까지 훈의 팀원들에게 맡기고 싶다는 뜻을 밝혀온 것이다. 특히 훈의 팀원들 중 고영이씨가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전해 들었다고. 달달커피 팀장이 대학 선배인데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서 어떤 분이신지 너무 궁금하다고. 혹시 모를 파토가 걱정되어 서류상 직인을 찍고 나서야 훈은 그간의 일들과 영이의 능력에 승부를 던진 사람들의 기대감을 소상히 전해주었다. 영이는 처음으로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한껏 들떴고, 파이팅 넘치는 영이 모습에, 신입사원 때 생각이 난 훈과 팀원들도 덩달아 으쌰으쌰 힘을 합쳐 밤낮없이 노를 저었다. 그렇게 모두 영혼을 갈고 하얗게 불태우는 사이 어느새 한 해가 다 지났고, 이불 밖은 위험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겨울이 왔다.12월의 첫날.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광고들이 온에어 됐다. 스타트업 대표와 직원들은 물론 훈의 팀원들 모두 ‘세계 광고 대상’ 감이라며 설레발쳤지만, 들인 공에 비해선 너무나 작고 미약하고 소중하기만 한 시청자들 반응에 영이는 의기소침 해졌다.
하루 종일 빗금 가득한 영이 얼굴에, 훈은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취업한 것만으로도 좋아서 뭐든 시켜만 달라, 생수통 들고 왔다 갔다, 잘 모르는 초행길 전동휠체어로 갔다 오는 게 훨씬 빠르다고 뽀르르 다녀와선 뿌듯하게 웃을 때는 언제고, 입사 1년 차에 광고계 톱스타라도 되는 줄 알았냐고. 그건 좀 아니지 않냐 핀잔주는 훈의 말에, 영이도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말랑말랑 풀어진 영이 기분에 은근 슬쩍 묻어가려고 훈이 괜한 헛기침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 뭐 할 거냐, 운을 뗐다. 크리스마스엔 항상 카페 ‘야옹’에서 친구들이랑 밤새워 수다 떨고 논다는 영이 말에, 훈은 태호의 약올리는 듯한 빙글 웃는 얼굴이 떠올라 입꼬리가 삐죽 내려갔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보는지 묻는 영이에, 훈은 당황해서 동혁과 해린을 돌아보더니 우리 회식 한번 해야 하지 싶은데 어떠냐 물었다. 뻔히 보이는 훈의 흑심에 끅끅대며 웃던 동혁이, 해린과 자기는 이미 선약이 있으니 회식은 다음 기회에 하자고, 맞죠, 송해린씨? 하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해린은 어금니 꽉 깨문 미소와 함께 동혁의 발등을 구두굽으로 쿡 찌른 뒤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고, 동혁은 치솟는 아픔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절뚝 절뚝 급하게 해린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들어간 탕비실의 불투명한 출입문에서 두 그림자가 바쁘게 어른거리는데, 훈은 히죽이며 재밌단 얼굴로 연신 메시지를 쓰기에 바쁜 영이 카톡의 주인이 대체 누구인 건지 궁금해 애가 탈 뿐이었다.온 세상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가 왔다. 대목인데도 너네 생각해서 내가 수익 포기하고 카페 문을 닫아걸었다며 생색내는 태호와, 근데 우리들 중에 기독교나 천주교 한 명도 없는데 이렇게 매년 거창하게 모여야 될 일이냐는 지선, 두 친구가 그러거나 말거나 영이는 카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캐럴을 흥얼대며, 영이의 작은 품 안에 쏙 들어와 제 몸을 맡긴 ‘나비’의 하얗고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한 태호가 지선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지선은 세상 어색하게 외투를 챙겨 들며 편의점에 사러 갈 물건이 있다며 일어났다. 태호도 갑자기 삼각김밥 새로 나온 맛이 먹고 싶다며 지선을 따라나섰고, 영이가 같이 가자는데, 두 사람 모두 격렬하게 손사레치며 카페를 비워둘 수 없다고, 영이더러 지키고 있어야 한단다. 이상하고 급작스레 자릴 비운 친구들에 갸웃대던 영이는 태호가 빠트린 지갑을 발견하고, 급히 따라 나가는데, 카페 문 앞에서 딱 마주친 누군가의 등장에 영이 휠체어가 끼익 멈췄다. 무쌍의 담백한 눈매가 기분 좋게 둥근 호를 그리며 영이를 바라보고 웃는 남자, 노훈이었다.
태호의 초대를 받고 왔다는 말에 영이는 내심 놀라며 훈과 함께 카페로 다시 들어가려는데, 한 송이, 두 송이, 흰 눈이 나풀나풀 내려앉고 있는 모습에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 들어갈 순 없다고 영이는 카페 밖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잠시 구경하다 들어가자며 훈을 앉혔다.
길 건너편에서는 태호와 지선이 두 사람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영이 저러다 감기 걸리는데, 담요 덮어줘야 되는데...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살펴주고 싶어 안달인 지선에게, 태호는 네 콧물이나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너, 손수건도 갖고 다니는 남자였어? 지선이 묻자, 우 모씨라는 여자가 손수건 갖고 다니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길래, 라며 태호가 코를 훌쩍였다. 양볼이 빨개진 지선이 저기 앞에 어묵 국물에 소주나 한잔하러 가자고 앞장섰다.말없이 나란히 앉아 소담하게 내리는 눈 구경하던 영이가 문득 훈과 눈이 마주치자 데인 듯 얼른 피했고, 카페 앞에 화려하게 꾸며놓은 트리와 알전구를 바라보며 쓸데없이 예쁘다며 구시렁댔다.
“이제 대답해 줄 때도 됐지 않나? 내년으로 넘길 셈이에요?”
답답한 얼굴로 훈이 물었다.
무슨 대답이요? 하고 이번에도 어물쩍 피하려던 영이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대답했다.
“나, 무대뽀 막 나가는 거 같지만 왕쫄보에요. 싫증도 엄청 잘 내고요. 일도 더 잘하고 싶고.”
훈은 알쏭달쏭한 영이 말을 읽어내 보려고, 영이 얼굴을 정성 들여 살폈다. 이에 영이도 이윽고 피하기만 하던 눈을 들어 훈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너무 확 오면 무섭고 질리니까, 천천히, 오래오래, 그렇게... 나랑 같이, 걸어요. 쓰읍! 태클 걸 생각 마요? 바퀴로 걸어도 걷는 건 걷는 거야.”
훈의 온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번졌고, 크리스마스 들뜬 날이 준 용기 덕분에 영이도 훈의 눈을 피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눈빛으로 서로를 깊이 어루만졌다.
내리는 눈과 반짝이는 트리, 언제 나왔는지 옆에서 나른히 졸고 있는 고양이 ‘나비’, 그리고 밤하늘 별빛에 취한 두 사람의 눈 키스로, 기록적 한파에도 폭닥하고 보드라운 겨울밤이었다.일러스트. 나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