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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아티스트는 어떤 사람일까. 그를 ‘아티스트’로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연기획사에서의 실무 경험을 비롯해 무용학과 전공, 댄스크루 활동, 예술감독에 이르기까지. 무대 위와 뒤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영역에서 쌓아온 감각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기반이 되었다. 현재는 농예술(Deaf Art)전문단체 ‘누비스(NUVIS)’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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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 듣기>

‘농문화’라는 정체성을 예술로 확장하다

김지연 아티스트는 2018년, 농인의 경제적 자립과 안정적인 소득 창출을 목표로 사회적 기업 ‘핸드스피크’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농예술에 대한 보다 깊은 탐구와 자율적인 창작을 위해 예술단체 ‘누비스’를 설립했다. ‘누비스’는 수어와 농문화를 농인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존중하며, 농인 아티스트들이 중심이 되어 주류 예술을 모방하지 않고 독자적인 ‘농예술(Deaf Art)’을 창작하는 단체다.
지금은 아티스트이자 대표로 활발히 활동 중이지만, 처음부터 수어 래퍼로 무대에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로서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수어로 랩을 표현해보았고, 관객의 진심 어린 반응은 수어가 곧 자신만의 예술 언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NuVis

농문화를 기반으로 예술을 만들어가기

ⓒNuVis

농문화를 기반으로 한 예술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음악을 즐길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김지연 아티스트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었다. 영상으로 리듬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수어의 감정이 무대에서 온전히 읽힐 수 있을지를 끝없이 고민해야 했다.
“수어로만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무엇인지 늘 연구했어요. 관객에게도 계속 질문을 던졌죠. 농인이 자신의 언어로 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고, 결국 무대 위에서 관객과 부딪히며 얻은 경험들이 저만의 언어가 되었어요.”
그렇게 쌓인 경험은 또 다른 씨앗이 되어, 후배 아티스트들을 양성하고 자문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김지연 아티스트는 예술감독이라는 새로운 역할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게 되었다.
‘수어 래퍼’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그는 뚜렷한 입장을 전한다.
“누군가를 ‘영어 래퍼’, ‘한국어 래퍼’라고 부르지는 않잖아요. 언어로 구분한다면 ‘미국인 래퍼’, ‘한국인 래퍼’가 더 자연스러울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저는 ‘수어 래퍼’보다는 ‘농인 래퍼’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김지연 아티스트는 농인의 언어와 감각으로 탄생한 예술은, 농인이 직접 창작하고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마치 한국어의 정서를 영어로 온전히 옮길 수 없듯, 수어 역시 고유한 세계와 감정을 지닌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최근 청인 아티스트들이 수어를 단순한 퍼포먼스 요소로 차용해 ‘수어 래퍼’, ‘수어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한다.
그는 “이런 활동은 수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때로는 농인의 예술을 도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수어는 농인의 언어이자 문화인데, 청인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술의 장식처럼 사용하는 건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에서 청인 아티스트가 활동하며 사용하는 ‘수어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보고 저와 같은 예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합니다”라며 자신의 확고한 신념도 분명히 전했다.

김지연 아티스트가 펼치는 농예술

가장 애착이 가는 무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지연 아티스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렇게 답했다.
“무대를 직접 설계했던 곡 ‘독도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시선과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아낸 무대였거든요.”
그는 이어, 최근 발표한 자작곡 ‘척’이야말로 가장 큰 도전이자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척’은 래퍼 허클베리피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그의 첫 자작곡이다. 그 동안 자주 “직접 작곡한 곡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아왔고, 청인의 음악을 커버했다고 말하면 종종 미온적인 반응을 마주해야 했다.
“자작곡이 아니라고 하면 그 반응이 늘 뜨뜻미지근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척’이라는 곡은 제게 의미가 커요. 이건 누가 만든 음악을 가져온 게 아니라, 제 언어로, 제 감정으로 만든 이야기였거든요.” 한국수어언어법이 제정되어 한국어와 한국수어가 모두 법적 공용어가 되었지만, 수어의 실질적 언어 지위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농인의 삶, 문화, 사회 인식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척’이라는 곡은 작은 울림이자 강한 질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김지연 아티스트는 “척은 단순히 음악을 만든 게 아니라, 농인의 언어와 정체성으로 사회에 말을 건 곡이에요. 저는 이 곡이 그런 미숙한 사회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고 믿어요”라고 답했다. ‘척’은 농인의 음악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다시 묻는 선언이자, 지금도 다수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던지는 울림 있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뮤지컬 <영웅>의 대표 넘버 ‘누가 죄인인가’를 수어 뮤직비디오로 제작하게 된 배경에도, 그와 같은 맥락의 고민이 있었다. 공연을 보고 싶어 예매했지만, 자막도 수어 통역도 제공되지 않았다. ‘장애인 할인 50%’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공연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접근성은 사실상 부재했다.
“할인이 없어도 괜찮아요. 대신 공연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막이나 수어 통역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게 진짜 관람권이잖아요.” 결국 입장 직전 배부된 시나리오를 통해 내용을 미리 숙지해야 했고, 그것조차 공연 직전 1시간 안에 소화해야 했다. 더구나 시나리오는 단 세 권뿐이었고, 함께 공연을 관람한 농인은 일곱 명이나 되었다.대사 외에도 수많은 지문과 설명, 역사적 맥락이 함축된 노래 가사들이 담겨 있었기에, 공연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김지연 아티스트는 많은 농인들과 그 명곡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결국 수어 뮤직비디오를 완성해냈다.

사회는 여전히 다수의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속에서 김지연이라는 한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 장르에 도전했고, 경험을 쌓아 농인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다져왔다. 그는 말한다. “예술은 감각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무대 위에서,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NuVis
ⓒNu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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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감각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