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의 빙상장. 스케이트화를 신는 순간 아이들의 표정이 바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하게 서 있던 아이들이, 빙상 위에 오르자마자 눈빛을 반짝이며 시원하게 미끄러진다. 이들은 바로 피터팬스포츠클럽 소속의 친구들이다. 2018년 몇 명의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시작한 작은 인라인 모임은 이제 인라인·스케이트·농구·배드민턴까지 아우르는 클럽으로 성장했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만들어온 그 특별한 성장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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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운동을 위해 결성된 인라인 동호회
“제 아들이 어렸을 때 스케이트를 배운 적이 있어요. 재활치료처럼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특수체육은 대부분 단기 프로그램이라 끝나면 흩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게 됐습니다.” 피터팬스포츠클럽 이승은 대표가 처음 인라인을 택한 이유다. 복지관이나 협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지원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중단되고, 아이들은 연속성을 잃곤 했다. 짧은 체험만으로는 중증 발달장애 아동들이 운동을 몸에 익히고 자신감을 갖기 어려웠다. “우리는 꾸준히 운동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직접 나선 거예요.”
처음에는 작은 체육관에서 몇몇 부모와 아이들이 모여 넘어지고, 손을 잡아주며 균형을 배우는 수준이었다. 재활치료실의 틀을 벗어나, 아이가 즐기면서 이어갈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고 그 답이 인라인이었다. 하지만 혼자 힘만으로는 오래 이어가기 어려웠다. 마침 은평대영학교로 전학을 간 아들이 방과 후 인라인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체육부장 선생님과 방과 후 인라인 코치가 뜻을 함께했고, 학교 강당은 아이들의 첫 운동장이 되었다. 비록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게 시도하고 넘어질 수 있는 울타리였다. 주말마다 강당에 모인 아이들은 조금씩 나아졌고, 부모들은 ‘끝나지 않는 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복지관·협회의 단기 프로그램이 아닌, 부모와 아이가 함께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운동 공동체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차근차근 지도하는 오현우 코치한번 타면 2시간을 타는 김동호 회원
인라인으로 키운 자신감과 성장
처음 인라인을 신었을 때 아이들은 중심을 잡지 못해 자꾸 넘어졌다. 헬멧을 쓰는 것도 버겁고, 강당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예민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넘어짐은 곧 배움의 시간이 되었다. 발달이 느려 걷는 것조차 힘들었던 아이들이 바퀴 위에서 균형을 잡고, 속도를 줄이거나 장애물을 피해 가는 법을 하나씩 익히면서 눈빛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물체가 있으면 그대로 부딪혔는데, 지금은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피해 가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죠.” 유단의 어머니 이소림 씨는 아들의 변화를 이렇게 전했다. 아이는 인라인을 타면서 몸을 크게 쓰는 법을 배우고, 대근육과 소근육이 함께 발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자신감이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롤러를 신기면 이웃들이 ‘나쁜 짓 하는 줄’ 오해할 정도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신고 당당하게 운동을 즐긴다. 작은 변화들이 쌓여 아이 스스로 성장의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에 이소림 씨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인라인은 유단에게 단순한 운동을 넘어, 자신을 믿는 힘을 키워준 도전의 무대였다. 여럿이 함께 모여 운동을 즐기는 경험은 단순한 체육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꾸준히 운동하며 끈기와 성실함을 배우고, 이를 음악이나 미술, 직장 생활에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실제로 회원 중 한 명인 김동호 씨는 미술작가이자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운동을 통해 배운 꾸준함이 작품 활동에도 큰 힘이 됐다”며 “무대에 설 때도 인라인에서처럼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고 전했다.
아이들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데 그치지 않았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는 힘을 길렀고, 친구들과 함께 달리며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도 배웠다. 스포츠를 통해 느낀 성취감은 학교생활과 일상으로 이어졌고, 부모들은 “아이의 표정이 밝아지고, 자신을 믿는 힘이 커졌다”고 전했다. 인라인은 단순한 운동을 넘어 아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성장을 동시에 안겨준 경험이었다.
부모의 힘으로 넓어진 무대, 스포츠클럽으로의 성장
아이들이 인라인에서 자신감을 얻자 도전의 폭도 넓어졌다. 스케이트로 겨울을 즐기고, 농구와 배드민턴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면서 운동 종목은 점점 다양해졌다. 단순한 취미 모임에서 출발했지만, 꾸준히 이어진 활동은 결국 2021년 ‘피터팬스포츠클럽’이라는 이름의 정식 스포츠클럽으로 자리 잡게 했다. 서울시 최초의 장애인 스포츠클럽 1호 등록이라는 성과도 부모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복지관이나 협회가 지원을 끝내면 거기서 모든 게 멈춰요.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으려 했습니다. 부모들이 직접 나서야 했죠.” 이승은 대표의 말처럼, 부모들은 단순한 동행자가 아니라 운영자이자 조력자로 나섰다. 회비를 모으고, 공간을 대관하며, 직접 홍보물과 계획서를 만들었다. 이처럼 부모가 운영진이 되어 부모 스스로의 성장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클럽 홍보 포스터와 현수막을 직접 제작하며 활동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이재인 씨는 딸 지후와의 소통 시작이 가장 큰 변화라고 손꼽았다. 운동을 시작한 뒤 태블릿을 통해 서툴지만 글자를 써가며 소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성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와 코치는 함께 아이들의 훈련 장면을 촬영하고 영상을 분석하며, 불편했던 동작이나 성취를 느낀 순간을 세밀히 살피며 아이들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처럼 부모는 아이들의 곁에서 든든한 응원자가 되었고, 동시에 클럽 운영의 주체로 나서며 ‘피터팬스포츠클럽’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힘을 보탰다. 부모와 아이, 그리고 코치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무대는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 함께하면 어떠한 성장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주는 피터팬스포츠클럽은 매주 수요일 오후와 토요일 오전·오후, 주 2~3회 정기 수업을 진행하며, 아이들이 꾸준히 몸과 마음을 단련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아이와 부모, 그리고 코치가 함께 어울려 만들어낸 배움과 성장은 피터팬스포츠클럽을 오늘의 모습으로 키운 가장 큰 힘이었다.
늘 즐거운 수업이 가득한 피터팬스포츠클럽
늘 즐거운 수업이 가득한 피터팬스포츠클럽
Mini Interview
이소림 씨
예전에는 물체가 있으면 그대로 부딪혔는데, 지금은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피해 가더라고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서 몸을 크게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집에서 롤러를 신기면 어색해서 눈치 보던 아이가 스스로 하고자 한 점이 가장 큰 변화예요.
오현우 코치
약 2년 전부터 합류했는데요. 원래는 유아체육과 일반 아동을 지도했으나, 피터팬스포츠클럽에서 처음으로 장애 아동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성실함에 감동하며 더 열심히 지도하게 되었죠.
정민수 코치
2012년부터 장애 아동을 지도하기 시작했으며, 2018년부터 피터팬스포츠클럽 수업을 맡아왔습니다. 인라인과 스케이트를 함께 지도하며, 아이들의 감각 발달과 부족한 부분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종혁 보조코치
선수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보조코치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아이들이 점점 자세를 교정하고 실력이 늘어나는 걸 보면서 보람을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