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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는 단지 복지국가라는 수식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상화(Normalization)’라는 철학을 세상에 처음 내놓으며, 장애인의 삶을 특별한 관리의 대상이 아닌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려준 나라. 그리고 그 철학은 곧 노동시장으로 확장되어, 장애인이 능력과 속도에 맞춰 일할 수 있는 ‘플렉스잡(Flex-job)’이라는 제도로 꽃을 피웠다. 우리 사회가 논쟁 중인 탈시설화, 지역사회 통합, 자립 지원의 과제에 덴마크의 여정이 어떤 힌트를 줄 수 있을지 찾아보자.

‘평범한 삶’을 향한 첫걸음

덴마크 장애인 복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정상화 원칙’을 주창한 뱅크 미켈센(Bank-Mikkelsen)이다. 그는 1950년대 덴마크 정부 정신지체과 행정관으로 일하며,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살아야 했던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졌다. 1959년 내각 행정령을 통해 그는 “지적장애인의 생활이 가능한 한 정상적인 사회환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여기서 ‘정상화’란 장애인을 정상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생활환경과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 원칙은 곧 대규모 수용시설 폐쇄로 이어졌고, 장애인은 마을로 돌아와 소규모 주거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상화 이후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은 존중받았다. 개개인의 욕구에 따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받고, 직업교육·주거 선택·사회 참여 기회도 확대됐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로 확산된 탈시설화와 자립생활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덴마크를 현대 장애인 복지의 원산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80년대 덴마크는 대대적인 사회서비스법을 제정했다. 장애인을 별도의 특별법으로 다루지 않고, 비장애인과 동일한 사회법 체계 안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보편적 복지의 대상’으로 인식하겠다는 철학적 선언이자 제도적 진전이었다.

의무를 넘어, 유연함으로 플렉스잡의 탄생

덴마크 장애인 정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은 고용 제도다. 당시 대부분의 선진국은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소득보장 재정을 줄이려는 방향을 택했고, 이는 곧 의무고용제(Quota System)로 이어졌다. 그러나 덴마크는 이와 다른 길을 걸었다. 장애인을 ‘할당제’에 의존해 노동시장에 끌어들이기보다, 그들이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ALMP, Active Labour Market Policy)을 선택한 것이다.
ALMP의 핵심은 단순 보호가 아니다. 장애인 개인이 원하는 일을 찾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필요한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체계였다. 교육, 직업 훈련, 맞춤형 근무 환경 제공을 통해 결국 ‘실제 일자리’와 연결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이러한 철학은 곧 플렉스잡 제도로 구체화되었다. 플렉스잡은 질병이나 장애로 노동 능력이 제한된 이들이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다. 근무 시간과 형태를 개인의 상황에 맞게 조정함으로써, 단순히 일자리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자기 속도에 맞춰 사회적 역할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덴마크의 선택은 의무보다 ‘유연함’을 통해 고용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장애인 고용 정책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덴마크 플렉스잡 제도의 특징은 표와 같다.

고용 인식의 달 “National Disability Employment Awareness Month” 캠페인 포스터
고용 인식의 달 “National Disability Employment Awareness Month” 캠페인 포스터
덴마크 플렉스잡 제도의 특징
구분 특징 내용
1 개별 맞춤형 근무 플렉스잡은 근로자의 건강 상태와 남은 노동 능력에 따라 근무 시간, 업무 강도, 업무 내용 등을 조정하는 맞춤형 일자리. 주당 1시간부터 30시간까지 다양한 형태로 근무할 수 있으며, 이는 고용주와 근로자, 그리고 지방자치단체가 협의하여 결정함
2 임금 보조금 제도
고용주:
고용주는 근로자가 실제로 일한 시간에 대한 임금만 지급함
지방자치단체:
근로자의 남은 노동 능력과 상관없이 소정의 최저임금을 보장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고용주가 지불한 임금 외의 나머지 부분을 보조금으로 지급함
이러한 방식은 기업이 장애인 고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어 고용을 꺼리지 않게 하고, 동시에 장애인 근로자는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함
3 고용 대상 및 목적
노동 능력 감소자:
장애, 만성 질병, 사고 등으로 인해 노동 능력이 크게 감소하여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일하기 어려운 사람
자립 지원: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단순히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요 목적임
4 고용의 유연성 기존 직장에서의 재고용은 물론, 새로운 직장으로의 취업이 가능한 제도이며 장애로 인해 이전 직장으로 복귀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

강제 대신 지원, 덴마크 플렉스잡의 철학

덴마크 플렉스잡 제도는 비단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해당되며, 장애인 고용으로 발생하는 추가 재정은 주로 정부가 부담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업에도, 장애인 당사자에게도 고용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국가가 책임진다는 점이 플렉스잡 제도의 핵심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덴마크 고용시장의 핵심 가치인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개념을 짚어야 한다. 플렉시큐리티는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의 합성어로, 높은 노동시장 유연성(쉬운 해고와 채용)과 강력한 사회 안전망(높은 실업급여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한 것이다. 이 점이 덴마크 노동시장 정책의 핵심이다.
플렉스잡은 이 모델에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속하며, 노동시장의 유연성 속에서도 장애인과 같은 취약 계층이 안정적으로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덴마크의 플렉스잡 제도는 의무고용제가 기업에 강제로 고용을 할당하는 방식이라면, 오히려 기업이 노동시장의 자유로운 법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즉, 노동시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과 개별 맞춤형 접근을 통해 장애인 고용을 증진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2008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이 정한 일자리 정책 권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협약은 기업 활동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장애인의 최저임금을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이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덴마크는 이미 플렉스잡을 통해 이를 구현하고 있었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결과 2009년 덴마크는 발 빠르게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하며, 장애인 인권 증진에 대한 국제적 의무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다른 나라들이 기존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바꿔야 했던 것과 달리, 덴마크는 이미 인권 기반의 복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장애인 고용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덴마크 플렉스잡 홈페이지
덴마크 플렉스잡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