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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고궁 가운데 창경궁은 웅장한 권위보다는 따스한 온기를 먼저 건네는 공간이다. 여인들의 웃음과 눈물, 역사의 비극과 치유의 시간, 그리고 오늘날 누구에게나 열린 배려의 품까지. 창경궁은 발길마다 이야기가 스며 있는 궁궐, 가장 다정한 쉼터로 우리 곁에 서 있다.

여인들의 숨결과 눈물이 밴 내밀한 공간

창경궁의 시작은 지극한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성종은 할머니, 어머니, 숙모까지 세 분의 왕실 어른을 모시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 그래서일까. 창경궁에는 날 선 위엄보다 포근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돈다. 전각과 후원에는 왕후들의 소담스러운 웃음소리와 후궁들의 깊은 한숨, 어린 공주들의 맑은 재잘거림이 켜켜이 쌓여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인 명정전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좁은 땅의 형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한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이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었던 통명전의 넓은 마당에 달빛이 비추면, 그 시절 여인들이 꾸었던 꿈과 삼켰던 눈물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비극의 여름, 사도세자의 절규

평화롭던 궁궐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진 것은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이 문정전 앞마당에서 벌어진 것이다. 지금은 고요하기만 한 이 공간에 한때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고뇌, 좁은 나무틀 안에서 스러져간 아들의 원통함이 서려 있었음을 떠올리면 발걸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훗날 정조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이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전해진다. 창경궁은 한 가족의 엇갈린 사랑과 증오, 그로 인한 아픔까지도 묵묵히 품어냈다. 궁궐 곳곳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그날의 슬픔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 너머로 역사의 침묵이 전해오는 듯하다.

도시와 어우러진 창경궁
도시와 어우러진 창경궁
계단과 휠체어가 결합된 유니버셜 디자인이 적용된 통명전 앞 휠체어 리프트
계단과 휠체어가 결합된 유니버셜 디자인이 적용된 통명전 앞 휠체어 리프트

잃었던 이름, 되찾은 존엄

창경궁의 시련은 근대에 이르러 가장 깊어졌다. 일제는 궁의 전각들을 무참히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였다. ‘창경궁’은 ‘창경원’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리며 왕실의 존엄을 잃고 유원지로 전락했다. 궁의 심장이 멎고 낯선 풍경이 덮었던 상처의 시간이었다.
기나긴 치유 끝에 창경궁은 마침내 제 이름을 되찾았다. 동물원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대온실은 그 시절의 흔적이자 이국의 위안처럼 남아 궁의 풍경에 독특함을 더한다. 이제 창경궁은 아픈 역사를 숨기지 않는다. 상처마저 역사의 일부로 끌어안으며 더욱 단단하고 깊어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다.

휠체어 사용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갖춘 장애인 화장실
휠체어 사용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갖춘 장애인 화장실

누구의 걸음도 보듬는 낮은 문턱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창경궁은 이제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문턱을 낮춘다. 몸이 불편한 이들, 느린 걸음의 어르신들 모두가 저마다의 속도로 궁을 거닐며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갖췄다. 홍화문에서 주요 전각으로 향하는 길은 대부분 평탄해 휠체어 이동에 무리가 없다. 곳곳에 마련된 장애인 화장실은 불편을 덜어주고, 통명전 앞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 모형이 준비되어 있다. 창경궁은 이렇게 어떤 걸음이라도 차별 없이 품어주는 따스한 궁궐이다.

창경궁 이용 정보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문의 :
    02-762-4868
  • 이용 시간 :
    09:00 ~ 21:00 (입장 마감 20:00)
    매주 월요일 휴궁
  • 주요 시설 :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춘당지, 대온실, 후원 산책로, 무장애 시설
    (평탄 보행로, 장애인 화장실, 촉각 모형)
  • 관람 요금 :
    어른 1,000원 (만 25세~64세)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무료
    한복 착용 시 무료